역사와 전통은 흘러야 한다 _ 최유진의 애니잡수다4

장진구 기자 / 기사승인 : 2021-07-28 08: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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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90년대생이 온다. 아니 이미 90년대생은 왔고 이제 곧 00년대생이 올 거다. 나이 좀 있는 , 자신의 꼰대력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가장 두렵게 만들었던 말이 ‘ 90년대생이 온다 ’ 일 것이다.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분들이 이들을 다소 어렵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들은 왔고 사회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저 문구에서 시작된 세대교체의 바람과 필요성은 이제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 , 사회 , 문화 어디에서든 속도의 차이일 뿐 점점 바뀌어갈 것이다.

 

35년 만에 폐지된 히로시마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1985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 사랑과 평화 ’ 란 주제로 막을 올린 히로시마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 지난해를 끝으로 폐지됐다. ASIFA (국제애니메이션필름협회)가 공인하는 4대 애니메이션 영화제 중 하나로 아시아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강국 중 하나인 일본에서 열리는 행사이기에 세계적으로 많은 작가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도 했다. 8월 뜨거운 햇볕이 잦아드는 저녁에 열리던 옥상 파티 , 그리고 파티를 가득 채운 다양한 나라의 아티스트들의 흥겨운 대화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어밖에 하지 못하는 감독과 얘기를 나눌 때 옆에서 영어로 통역해주던 분이 스위스의 거장 조지 슈비츠게벨 감독이었을 줄이야. 가슴 설레던 추억과 함께 35년이란 세월을 견디고 지켜온 이 영화제가 없어진다는 것은 무척이나 아쉽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변화의 시점을 놓친 순간부터 폐지는 예견돼 있던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영화제의 전통과 상징
35년간 히로시마 영화제를 이끌어온 건 키노시타 사요코 씨다. 사요코 씨는 남편이자 작업의 동반자였던 키노시타 렌조 감독과 함께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온 애니메이터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를 다룬 작품 <피카돈>을 인연으로 이 영화제가 시작됐다.
그때부터 사요코 씨는 누구보다 의욕적으로 그리고 고집스럽게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영화제를 이끌어왔다. 사요코 씨의 독보적인 카리스마 , 작품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은 이 영화제만의 색깔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폐막식 당일 폐막 선언과 함께 춤을 추는 사요코 씨의 모습은 영화제의 전통이자 상징이었다. 그것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 히로시마는 사요코란 이름 아래 독자적인 이미지와 위치로 자리매김해왔고 우리는 그것을 전통이라 불렀다.

 

보지 못한 영화제의 변화
히로시마 영화제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경쟁부문에 일본 작품이 단 한 편도 오르지 못한 해가 있었다. SNS에서는 차츰 일본 젊은 감독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퍼지기 시작했고 간간히 일본 작가의 작품을 상영했을 뿐 프랑스 , 러시아 등 유럽 작품 중심으로 흘러갔다. 또한 고집스럽게도 지난 행사와 같은 형식과 내용을 반복해왔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신청서는 자필로 서명해 우편으로 발송해야 했고 모든 작품을 DVD로 보내야 했다. 다른 영화제들이 이미 온라인으로 출품되던 시기에도 그랬다. 영화제를 격년으로 개최해야 한다는 ASIFA의 규정은 안시 , 자그레브 , 오타와 누구도 지키지 않았지만 히로시마는 꼭 지켰다. 상영본의 원본을 고집해 일본어 자막을 만들지 않았다. 고집스럽지만 아름다워 보였던 전통을 벗어나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변화는 보지 못한 채 히로시마시의 결정에 따라 영화제는 끝내 폐지됐다.

 

히로시마시 , 새로운 애니메이션 행사 발표
지난 4월 히로시마시는 새로운 행사 계획을 발표했다. 평화와 음악 , 미디어 예술이 결합된 ‘ 히로시마국제평화문화제 ’ 를 개최하기로 한 것이다.
클래식음악과 애니메이션이란 다소 기괴한 조합과 무엇이든 한곳에 모아놓으면 잘될 것이란 발상이 우려스럽지만 프로그램은 꽤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환태평양 지역의 애니메이션 경쟁부문 , 장르별 애니메이션 경쟁부문으로 다른 행사와 차별화했고 자국 작품을 대상으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처럼 진행되는 히로시마 어워드 , 차세대 교육을 위한 아카데미 신설 , 일본 및 해외 작가를 위한 시설 운영 계획 등을 내놨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그램을 이끌 감독으로 일본의 대표 독립애니메이션 감독인 코지 야마무라 씨를 전면에 내세웠으며 , 젊은 애니메이션 평론가이자 독립애니메이션 프로덕션 대표 노부아키 도이 씨를 프로듀서로 선정했다. 히로시마시의 적절한 전략으로 평가되지만 기존 영화제보다 훨씬 적은 예산으로 꾸려질이 행사가 실제 어떻게 치러질지는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

 

히로시마 영화제가 우리에게 남긴 것
35년이란 역사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선 이 영화제가 없어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변화를 갈망했다.

자신의 삶 절반을 영화제와 함께하고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해외 영화제에 참여하며 감독들과 소통하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 그녀의 남다른 에너지를 존경한다. 때문에 적절한 변화의 시점을 놓친 것이 더욱 안타깝고 세대교체를 이뤄내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편으로는 내심 충격이었다. 이렇게 오래된 영화제가 한순간에 없어질 수 있단 말인가. 적절한 변화를 이뤄내지 못하고 자국 창작자의 지지로부터 멀어지면 이렇게 하루아침에 문을 닫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거운 교훈처럼 남았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이 독립애니메이션 감독과 젊은 평론가가 만들어갈 행사라는 것을 보면서 이 행사가 어떻게 자리 잡고 성장할 것인지를 생각하니 더욱 긴장된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영화제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들어오는 젊은 영화제가 비단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변화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고 새로운 세대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것 또한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지키고 싶은 역사와 전통이 있을수록 적절한 때를 만들어나가는 것 역시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 한다. 멈춰 있는 역사와 전통을 오래 멀리 흐르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최유진
 ·(사)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사무국장
 ·인디애니페스트 영화제 집행위원장
 ·애니메이션페스티벌 심사위원·자문위원 활동

 

 

 

 

아이러브캐릭터 / 장진구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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