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의 한국 애니메이션: 근현대사 - 41 _ 이남국 교수의 애니메이션 아카이브 52

장진구 기자 / 기사승인 : 2021-12-24 08: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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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동양방송(TBC-TV)이 한국 최초로 하청계약을 맺고 1969년에 설립된 국제아트프로덕션이 미국과 하청계약을 체결한 이후 일부 작업만이 아니라 연출 , 원화 , 동화 , 선화 , 채화 , 배경 , 촬영 , 편집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공정을 소화해내면서 한국의 만화영화 하청산업은 구조화 , 시스템화 돼왔다.
더구나 방송국들은 하청 제작된 작품들을 다시 싼 가격으로 수입 , 방송할 수 있는 구조 때문에 굳이 만화영화를 제작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일한 태도를 보였다.
방송국들은 국내 제작보다 해외 수입이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 일본과 미국 만화영화를 대량으로 수입했고 특히 일본 작품의 경우 제작 생산국이 모호한 국적불명 상태로 들여와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30여 년간 시청자들을 속이고 방영해왔다.
지금도 애니메이션들이 국적을 알 수 없는 상태로 방영 , 상영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국가의 미디어 책임자들이 이러한 일들을 단지 이윤을 남겨야 한다는 미명 아래 이토록 오랜 기간 이 같은 행위를 상습적으로 벌여온 것을 생각하면 섬뜩하기까지하다.

그러나 넬슨 신의 애이콤(AKOM)을 비롯해서 한국의 OEM 여건을 조성했던 동양TV(이병철) , 국제아트(송정훈) , 예림동화(이동영) , 대원동화(정욱, 안현동) , 세영동화(김대중) , 유니버설아트(정병권) , 교육동화(유성웅) , 동서동화(한상호) , 루크필름(김태익, 래리 스미스) , 선우프로(강한영) , 한호흥업(김석기) , 플러스원(이춘만) , 새롬(김길환) , 동우동화(김영두) , 코코 엔터프라이즈(전명옥) , 라프드래프트(박경숙) , 한신 코퍼레이션(최신묵) 등 많은 사람들이 온갖 어려움에도 방대한 물량의 일감을 가져오면서 국제적으로 제작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이 세계 3대 애니메이션 제작국가 중 하나라는 명성을 얻게 되는 데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공헌에도 우리나라만의 순수창작 작품과 독자적인 캐릭터 개발에 있어 당시 애니메이션 종사자들의 저력이 매우 미약해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는 한국도 과거와 달리 창작의 세계로 진입해 스스로 재도약을 시도할 수 있을 만큼 자본이나 기술적 여건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제 한국 애니메이션이란 배를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느냐 정하는 것은 애니메이션 종사자들의 손에 달려있다.
다행스럽게도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TV 만화영화의 창작과 제작이 국가 차원의 지원으로 활성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1960년 중반부터 시작된 신동헌. 신동우 감독의 순수 창작 만화영화 홍길동을 필두로 박영일 , 용유수 , 조항리 , 임정규 , 김청기 , 김대중 등 많은 분들이 일본 로봇물의 일부 표절 및 모방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지만 대부분 우리 이야기로 창작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점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1999년 11월 18일 경향신문은 ‘ 백년하청-기획 없인 문화도 없다-다움연구회 ’ 란 제목의 기사에서 “ 한국 애니메이션 기술은 세계적인데 왜 하청에만 그치는가. 기획이 없다고들 하죠. 좋은 기획이. 영화는 물론 한국의 연극 , 뮤지컬 , 미술을 살려낼 거라는 거죠. 그런데 정작 문화기획자를 키우려는 노력은 없어요 ” 라고 전했다.

현재 대부분 유아동용 작품이 한국 애니메이션산업 전체를 주도하는 현상은 연령별 다양성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심히 우려되는 부분이다.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으로 얻게 된 노하우를 대부분 유아동용 작품 제작에만 주력하는 현상은 우리의 저력이 아직도 접근이 쉬운 유아기 신드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단순함에 머물고 그 안에만 안주하려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한다.
미국과 일본처럼 실패를 딛고 일어서려는 도전정신과 모험이 뒤따라야 한국 애니메이션산업은 더욱 성숙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실사 극영화가 아동용만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연령대를 타깃으로 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부 애니메이션 감독들(민경조 , 이성강 , 오성윤 , 안재훈 , 연상호 , 장형윤 등)이 이러한 신드롬에서 벗어나려고 실험적인 제작을 시도하고 있다. 우리의 진정한 얼굴을 보여주려는 그들의 노력들이 실현되도록 국가적 , 사회적 차원의 지원이 꾸준히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극영화 위대한 쇼맨의 마지막 장면에서 역사적으로 위대한 쇼맨 , 피티 바넘(P.T, Barnum)의 유명한 명언이 나온다.

“ 가장 고귀한 예술은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The noblest art is that of making others happy.- P.T.Barnum-1889.1.22) ” .
그렇다.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산업으로만 보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예술로 봐야 한다. 비록 하청 작품들은 우리의 작품이 아니고 외국 작품들이었지만 이를 통해 전 세계인들에게 예술적 , 문화적으로 크게 기여해왔음은 틀림없다. 단지 우리의 것들을 준비하고 마련하는 일에는 적지 않게 소홀히해왔음을 자각하고 전 연령대를 아우르는 보다 진전된 기획과 창작에 더욱 매진하길 기대한다.
애니메이션 하청역사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고 본래 진행하던 역사 이야기를 연대순으로 다시 이어가보자.


1973년 한국 애니메이션의 상황 

1972∼76년은 국내 극장용 창작물이 부재했던 동시에 미국과 일본 TV 만화영화의 수입이 봇물을 이루고 해외 만화영화의 하청 제작이 태동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문화적 영향력이 극에 달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즉 우리의 만화영화 작품들은 종적을 감춘 때였다.

 

 


1973년 1월 13일 경향신문은 ‘ 40불로 출발 , 미키 마우스로 명성을 얻어-사양화 딛고 반세기-디즈니 왕국 ’ 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 금년은 이 월트 디즈니 왕국이 설립된 지 반세기가 되어가는 해이다. 1923년 무명의 청년 만화가 월트 디즈니가 그의 동생 (필자 주: 동생이 아니라 형이 맞다) 로이와 함께 할리우드로 왔을 때 그의 주머니에는 단돈 40달러가 있었을 뿐이다. 둘은 헌 차고를 빌어 스튜디오를 만들고 만화의 나라 엘리스와 토끼 오스왈드를 제작해냈다.…(중략)…흥행업자들을 찾아 전국을 순회하며 기차 여행을 하던 중 미키 마우스를 착상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디즈니의 이름이 영화시장에 조금씩 높아져 간 것이다 ” 라고 보도했다.
이처럼 세계적인 디즈니도 초기에는 매우 어려운 행로를 걸어왔고 그의 끈기와 인내 , 만화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금세기 최고의 미디어 왕국을 세우게 됐다. 1923년에 시작 된 디즈니 그룹은 1973년 50주년을 맞아 특별 메달 등을 출시했다.

 

 

1973년 국립영화제작소는 본청 제작 시스템을 보여주면서 홍보용 영상물을 만화영화로 제작하는 과정을 ‘ 대한뉴스 제408호-리버티 뉴스 500보 맞이 ’ 편에서 자세히 소개했다. 중앙청 내 서북쪽에 자리한 국립영화제작소는 1959년에 신축 , 완공된 3개의 동으로 구성됐다. 본관인 A동은 사무실과 시사실 , B동은 재촬영과 동시녹음을 할 수 있는 촬영소 , C동은 녹음시설로 꾸며졌다. 미술실에서는 영화 앞뒤의 자막과 그림에 보충해야 할 그림과 만화 등을 그려내 한 장 , 한 장 촬영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1973년 1월 13일 경향신문은 ‘ 해외서 인기 끄는 우리 만화영화-수요 많은 미국 , 일본 진출이 가장 유망-주문 늘어 올해 3~4편 제작-기술적 어려운 점 뒷받침을 ’ 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 우리나라 만화영화가 해외에서 인기를 끌자 당국은 만화영화 육성을 위해 셀룰로이드 , 비닐 컬러 , 각종 화구 등 소모성 자재에 대한 관세 면제와 해외 공관을 통한 만화영화 피아르 , 각종 영화제 출품 지원책을 강구 중인데 만화영화 수출 대상국 중 시장이 가장 넓은 미국은 1년에 4백만 달러 , 일본은 240만 달러어치의 외국 만화영화를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 라고 전했다. 하지만 만화영화 제작에 소요되는 자재들에 대한 관세 면제는 대부분 국내 창작이 아닌 해외용역(하청)에 초점이 맞춰져 소위 빛 좋은 개살구와 같았다.

 

 

또한 이 기사는 “ 만화영화 주문이 밀리기 시작한 것은 홍길동 , 손오공 , 황금철인 , 홍길동장군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 번개아톰 등 작품이 세계시장에서 인정받은 데다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만화영화의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중략)… 장편 만화영화(상영시간 1시간 20분대)를 제작하는데 2,000만 원의 제작비와 1년간의 제작기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영세한 영화사들은 엄두도 못 내고 세기상사에서 1년에 1편 정도를 제작했는데 주문이 늘자 올해에는 3∼4편의 만화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서두르고 있다.…(중략)…만화영화 수출로 인한 외화 획득은 상당히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장편 만화영화는 편당 1,000여 장면으로 이뤄져 한 장면에 평균 50여 장의 동화로 그려져야 하기 때문에 5만여 장의 그림이 등장한다 ” 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1972년 이전에 제작된 국산 만화영화들이 해외에서 인기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안방극장인 TV의 등장과 외국 TV 만화영화의 수입으로 한국 만화영화 제작은 1976년까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아이러브캐릭터 / 장진구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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