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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일본과 문화교류 차원의 일환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 제일동화가 파견된 동양동화가 제작한) 첫 시리즈는 고대 아틀란티스 문명의 결정체인 황금박쥐가 악을 물리친다는 내용의 황금박쥐였다. 작품 감수는 고타 고지, 제작은 가주로 구사노, 작화감독은 모리카와 노부히데 (1965~1969년 4년간 한국 체류), 미술감독은 가즈오 키무라가 맡았다. 1967년 4월 1일부터 1968년 3월 23일까지 20분 분량의 연속물 전체 52화가 TV로 일본에서 방영됐다. 한국에서는 TBC동양방송에서 1967년 7월부터 인기리에 방영됐다. 극장용 장편은 TV용 4화의 확장판으로 박사 일행이 아틀란티스 문명을 발굴하다 황금박쥐를 처음 만나는 내용과 황금박쥐의 도움으로 악당을 물리치는 내용을 담았다. 1968년 7월 17일 한국의 국제극장에서 극장판이 상영됐다.

두 번째 작품은 ‘요괴인간 벰’으로 일본에서 보내온 각본과 그림 콘티를 바탕으로 한국에 파견된 일본인 애니메이터들이 원화를 그렸다. 한국 측에선 동화, 트레스, 채색, 배경 등 마무리 작업을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요괴인간 벰의 시청률이 떨어지고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제작이 중단됐다. 물론 한국과의 계약도 자동 파기됐다. 삼성물산의 고 이병철 회장이 1966년 5월 일본 동영영화의 자회사인 제일동화와 계약을 맺고 애니메이션 작업의 하청을 맡았던 스토리와 시나리오는 일본에서 들여오고 작화와 촬영 작업은 한국에서 2년 6개월간 전담, 제작해 당시 미화 18만 달러를 벌어들였으나 결국 문을 닫게 됐다.

이와 관련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당시 동양방송 관계자들이 조금만 더 국내 TV 창작 애니메이션 제작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일본과 하청 계약이 종결됨과 동시에 당시의 인력으로 한국 TV 창작 만화영화 제작이라는 또 다른 물꼬를 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화적 측면보다 산업적 측면을 더 중요시한 나머지 ‘대의를 그르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제작진들은 박영일, 한성학, 유범웅, 이준웅, 임정규, 이동영, 배정길 씨 등이었다.
TBC동양방송은 1980년 11월 30일, 군사정권의 언론 장악의 희생양이 돼 마지막 전파를 송신했다. 그날 TBC 임직원들이 시청자들에게 마지막 고별 인사를 전하고 있던 시간, KBS에서는 ‘한국 언론 구조의 선진화’라는 제목의 대국민 홍보 방송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 전파를 송신한 후 TBC 채널이 돌연 KBS 제2TV로 바뀌었다. 곧이어 ‘로봇 애니메이션 방영 금지령’과 함께 미국 애니메이션들로 어린이 TV 시간대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만화와 만화영화를 무조건 불량한 것으로 보고 프로그램까지 축소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매우 편협하고 폭압적이면서 근시안적 사고였음을 깨닫게 된다(1972년 5월 4일자 동아일보 참고).


1965년 8월 13일, 월트 디즈니의 신데렐라가 메트로 극장에서 재개봉한다. 1965년 12월 22일, 제작자 맥스 플레이셔, 감독 데이브 플레이셔, 감독 샤머스 컬헤인의 ‘난장이 소동’이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각각 개봉됐다. 이 영화는 플라이셔 스튜디오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다. 디즈니가 제작하지 않은 영화며, 미국에서 제작된 여섯 번째 애니메이션 장편영화였다.

1966년 6월 3일 만화대본업정화협회는 남산 어린이놀이터에서 악서배척의 일환으로 서울 시내 2천여 개 대본업소에서 압수한 외설 만화, 유해 만화 등 1만여 권을 불태우기로 결정했다.

1966년 11월 14일 국립영화제작소는 ‘어린이를 보호하자(대한뉴스 제 599호)’는 홍보 영화를 제작했다. 아동 보호를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만화영화가 아니라 슬라이드 형식의 만화 스틸 컷을 사용했다. ‘학교에 가고 올 때는 여럿이 함께 다닙시다’, ‘외딴 곳에서 놀지 맙시다’, ‘낯설은 사람의 유혹에 넘어가지 맙시다’, ‘값진 옷을 입혀서 혼자 내보내지 맙시다’와 같은 주제를 담아 위험으로부터의 아동을 보호하는 법을 제시했다.



1966년, 한국 최초의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 제작이 시작됐다. 광고 제작 경력을 갖춘 신동헌(신동우 화백의 친형) 감독이 서울 한남동의 세기촬영소(회장 국쾌남, 사장 우기동, 본사는 서울시 중구 충무로4가 125)에 동화부를 설치하고 50여 명의 제작팀을 조직한 후 기획, 감독해 1967년 1월 21일 개봉했다.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은 신동우 화백이 소년조선일보에 연재하던 ‘풍운아 홍길동’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한국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역사에 길이 남을 영화로 자리매김한다.

신동우 화백이 1965년부터 1969년까지 4년간 소년조선일보에 1천3백여 회 연재한 만화 풍운아 홍길동은 1969년 근일문화사에서 총 8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2003년에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총 6권 형식으로 재편집해 재출간됐다.


풍운아 홍길동은 고 신동헌 감독이 스토리의 일부분을 각색하고, 캐릭터 디자인도 애니메이션화한 작품이다. 즉 만화를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각색했다.

1966년 6월 18일자 동아일보는 ‘만화 홍길동 제작’이라는 표제어 아래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한국 최초의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칼라)이 세기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만화가 신동헌 씨를 비롯한 60명 화공의 손을 거쳐 만들어질 이 영화의 상영 시간은 약 1시간 10분, 오는 10월까지 제작완료 예정”
1967년 1월 14일에는 ‘홍길동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영화를 완성’이라는 표제어 아래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이 되는 장편 극 만화영화가 완성되었다. 신동헌 씨가 감독, 세기상사 제작으로 50여 명의 애니메이터와 130여 명의 채색원이 동원된 이 작품은 신동헌 씨의 만화 6만 장으로 구성된 1시간 20분짜리로서 지난해 3월부터 시작하여 이제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만화영화는 제작비가 자그마치 2천만 원이나 소요되었다”


1967년 1월 서울신문은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 버린 것 합쳐 10만 장…’이라는 표제어 아래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장편 만화영화가 만들어졌다. 만화가 신동헌 씨가 총감독을 맡은 홍길동. 러닝타임 1시간 15분의 색채영화이다. 세기상사 대표 우기동 제작의 이 작품은 여느 극영화의 다섯배를 넘는 제작 코스트가 들었다는 사실로도 짐작이 가지만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힘이 든 작품이다. 65년 11월에 기획, 66년 5월에 작업을 시작하여 약 8월 만에 제작을 끝냈다. 동원 인원도 고정 멤버만 1백 명을 육박하였다… NG로 버린 것까지 10만 장. 그러나 이것만 그런 게 아니라 스케치까지 합치면 몇 10만 장을 그렸는지 셈하는 것조차 골치 아프다는 신동헌 씨의 말이다. 오케스트라와 합창의 음악 녹음 단계가 아직도 남았다는 그는 힘은 들었지만 좋은 공부가 되었다고 흐뭇해한다. 이번 실험을 바탕으로 하여 앞으로 국제 수준의 만화영화를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각오…
1967년 1월 28일, 홍길동이 상영을 시작한 지 일주일 후 경향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어린이의 꿈과 우상 홍길동… 만화영화의 보편적인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 이 영화는 한마디로 성공적인 작품이다. 내용의 구성도 제법 짜여지고 그림의 형식과 색채, 제작 기술도 흠 잡을 데 없어 걱정했던 잔상 현상을 훌륭히 살렸다… 정신적으로 가난한 어린이 세계에 홍길동은 꿈과 우상을 만들어주는 한편, 만화영화의 기업적인 성공을 보여주었다. 총감독 신동헌, 구성 신동우, 촬영 박성근… 어린이의 모험심과 꿈을 가득 채워준다.

이남국
·전 홍익대 조형대학디자인영상학부 애니메이션 전공교수
·전 월트디즈니 & 워너 브러더즈 스튜디오 감독 및 애니메이터
·국립공주대학교 영상예술대학원 게임멀티미디어학과 공학석사
·CANADA SENECA COLLEGE OF APPLIED ARTS & TECHNOLOGY
출처 : 월간 <아이러브캐릭터> 2019.06월호
<아이러브캐릭터 편집부>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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