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개봉된 괴수 대전쟁(러닝타임 70분)은 로봇과 공룡이 등장하는 SF 만화영화였다. 이 작품의 원화를 담당했던 원화맨(Key Animator) 김동택이 그린 원화의 예제에서 보듯 에른스트라는 정체불명의 악당이 조종하는 수많은 괴수들이 우주탐사에 나서는 로켓발사를 방해하고 에펠탑, 자유여신상 등을 부셔버린다. 이 괴수들을 물리치기 위해 하인리히 박 박사와 알리 박사가 힘을 합쳐 괴수를 물리칠 수 있는 슈퍼 자이언트를 개발해 괴수들을 격퇴 한다는 줄거리다.



1972년 괴수 대전쟁 이후의 공백기가 있기 전까지, 국내 창작 장편의 대부분이 당시 서울 중구 예장동 8의 33번지 (지금의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있는 지역)에 있던 한양스튜디오(대표 이경순)에서 사운드를 녹음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서대문구 만리동의 새 녹음실(대표 김윤걸), 중구 충무로의 대한 영배 녹음실(대표 유재훈), 이후 널리 활용된 청맥 녹음실도 있었다.

필자는 세기상사의 괴수 대전쟁의 녹음 작업을 세기상사의 용유수 감독과 함께 한양 스튜디오에서 살펴볼 수 있었 다. 초대형 스크린 위에 사운드 없는 영화를 영사할 때, 1 층 극장의 카펫 바닥 중앙에 마이크로폰을 설치하고 그 앞에 각자 대본을 든 성우들이 서서 목소리를 녹음했다. 그러면 3층 녹음실에서는 냉전시대에 스파이들이 도청 녹음을 할 때 애용했던 스위스제의 6mm(1/4인치) 동기형 아날로그식 녹음기, 나그라(Nagra: 창시자는 스테판 쿠델 스키. 고성능 영화용으로는 독보적이며 현 디지털 장비와 쌍벽을 이루고 있다)를 사용해 1번 테이프에 대사를 녹음하고, 2번 테이프에는 효과음을, 3번 테이프에는 음악을 각각 녹음한 후 영화 필름과 싱크로 즉 동조되도록 편집했 다. 이후 3개의 사운드들을 하나의 6mm 테이프에 최종 편집해 사운드 더빙을 완성했다.

음악, 대사, 효과음을 별도로 녹음하고 6mm 테이프 또는 디지털로 더빙을 한다. 다음은 음량 조절과 함께 하나의 테이프 또는 디지털로 믹스한 후 자기 방식, 광학 방식, 디지털 방식으로 최종 완성한다.

괴수 대전쟁으로 막바지에 이르던 국내 창작 제작 열기는 1973년부터 종적을 감추었다. 주요인은 짧은 제작 기간, 저렴한 제작비, 열악한 기자재, 척박한 작업 여건, 도급제 방식의 최저 인건비, 기술 인력의 절대 부족, 관객들의 외면, 정부의 무관심과 외국 장편 만화영화들의 수입 및 상영, 그리고 혜성과 같이 나타난 TV의 등장 및 대량 보급과 함께 미국과 일본에서 수입한 만화영화의 방영으로 인해 극장에 가지 않아도 안방에서 쉽게 만화영화를 감상할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1972년 12월을 고비로 장편 만화영화 제작은 시들해지고 1976년까지 약 3년간의 잠정적 암흑기에 들어서게 된다. 이 기간은 한국 만화영화 역사에서 매우 슬픈 기간이 되었다.

이러한 침체기가 TV 만화영화 방영에는 큰 도움을 줬다.
채널 9의 국영 서울텔레비전방송국 KBS-TV(1961년 12 월 31일 정식 개국)가 개국하면서 본격적인 TV 방송 시대가 열렸다. 이어서 채널 7의 민간 상업방송인 TBC-TV 동양방송(1964년 12월 7일 개국), 그리고 채널 11의 MBC-TV 문화방송(1968년 12월 31일 개국) 등이 개국 하면서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만화영화들을 수입, 방영했다. 이로써 TV 만화영화 시리즈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대한민국 제1호 국산 텔레비전은 1966년 8월에 등장했 다. 마침내 국내 최초의 19인치 흑백TV 금성 텔레비전 VD-191 500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48cm, 즉 19인치 사이즈의 흑백 TV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당시 TV의 가격은 6만 원으로 쌀 27가마 값에 달했지만 최초의 국산 TV는 공개 추첨을 통해 당첨된 사람에게만 팔았을 정도로 인기였다. 국산 1호 흑백 텔레비전인 금성 VD-191, 진공관식 19인치 1호 제품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561-2호로 등록됐다.

1965년 6월 26일 최초의 민영 방송국인 동양방송공사가 출범해 1965년 12월 7일 TBC가 방송을 시작했다. 디즈니의 만화영화 시리즈와 만화영화 제작 방법을 매주 소개 하던 디즈니랜드 프로그램을 방영해 아동들에게는 꿈을, 만화영화 감독을 꿈꾸던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국가기록원의 문화공보부 1980년 11월 공문서 자료,‘ 컬러텔레비젼 방송 추진계획(002,003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목표: 컬러텔레비젼 방송의 본격적인 실시에 앞서 제반 기술 점검 및 보완대책을 강구하여 시행에 만전을 기하고자 함. 2.방침: 가-1980년 12월 1일부터 컬러 텔레비젼 시험방송을 실시함. 나-컬러 방송의 교육적, 사회적 영향을 고찰하고, 시설능력 범위 내에서 단계적으로 확대 실시함. 다-1981년 3월부터 시행하는 교육방송도 컬러방송 으로 실시함. 라-컬러방송 난시청 지역을 해소하여 전 국민이 컬러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여건을 조속히 달성함.
마-MBC가 단기간 내 컬러방송 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함.”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컬러TV 방송이 결정됐다. 1980 년 12월 1일에 KBS 1TV에서 처음 컬러 방송을 시작했고 KBS 2TV와 MBC TV는 1980년 12월 22일부터 컬러 방송을 했다. 완전한 컬러 방송은 이후 1981년 1월 1일부터 시작했다.

첫 컬러 방송이 시작되면서 이른바 ‘총천연색 안방극장’ 시대가 열렸다. 이로써 1960년대 라디오 시대에서 1970 년대는 텔레비전 시대로 대전환됐다. 1975년 이후 텔레비전 보급률이 급속히 높아지면서 텔레비전은 대중의 일상 생활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컬러TV는 1974년 아남전자가 일본 마쓰시타전기와 합작해 한국내쇼날이라는 이름으로 2만 9,000여 대를 생산했다. 1977년부터는 금성사와 삼성전자도 참여하면서 11만 대를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컬러TV는 1980년 아남 TV(CT-808)가 첫 제품으로, 1981년 1월 1일부터 컬러 방송 시대를 여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물론 만화영화도 총천연색으로 시청할 수 있게 됐다.

이남국
·전 홍익대 조형대학디자인영상학부 애니메이션 전공교수
·전 월트 디즈니 &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 감독 및 애니메이터
·국립공주대학교 영상예술대학원 게임멀티미디어학과 공학석사
·CANADA SENECA COLLEGE OF APPLIED ARTS & TECHNOLOGY
출처 : 월간 <아이러브캐릭터> 2020.3월호
<아이러브캐릭터 편집부>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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