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강광신 감독은 국내 최초의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 제작에 참여하며 애니메이터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미로동화를 창업해 다수의 일본 작품을 의뢰받아 제작했으며, 미국 디즈니의 흑백 만화영화를 컬러로 채색, 재생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2000년대 초반 현직에서 물러나기까지 40년이 넘는 세월을 오직 애니메이션 제작에 바친 강광신 감독의 라이프 스토리를 소개한다.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 제작에 참여
강광신 감독은 1966년 국내 최초의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인 ‘홍길동’ 제작에 참여하며 애니메이션 일을 시작했다. 홍길동은 신동헌 감독이 서울 한남동의 세기촬영소에서 50여 명의 제작팀을 꾸려 만든 만화영화였는데, 이때 동화부에서 일한 멤버 중 한 명이 강광신 감독이었다.
“제가 세기촬영소에서 일하게 된 것은 운명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입사 전 저는 동네 형님과 함께 강원도 주문진에서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해 중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는 야학강습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을 인솔해 설악산에 갔는데 거기서 신동헌 감독님을 만나게 됐죠. 공손하게 인사드리고 평소 선생님의 그림을 보면서 미술 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자 미소 지으며 제 손을 잡아주시더군요.”
당시 스무 살 청년이던 강광신 감독은 ‘학원지’에 실린 조흔파 선생의 명랑소설 얄개전에 수록된 신동헌 화백의 삽화를 보고 만화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동료 애니메이터와 미로동화 창업
강광신 감독은 홍길동을 시작으로 신동헌 감독의 다음 작품인 ‘호피와 차돌바위’ 제작에도 참여했다. 이어 196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정부 홍보물을 제작, 출판했던 국제아트 프로덕션에 입사해 흑백 영상을 컬러로 재생하는 일을 했다.
“6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서 미국 애니메이션의 외주 작업이 활발히 진행됐습니다. 작업량이 많아지다 보니 애니메이터들의 촬영 기술도 자연스레 늘고 역량도 향상됐죠. 당시 애니메이터들은 자신들이 힘들게 작업한 컬러 채색 재생 작업으로 외화벌이에 일조한다는 데 보람을 가졌고,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강광신 감독은 1972년 유니버셜 프로덕션, 74년에는 동기프로를 거쳐 77년 애니메이터로 활동하던 배정길ㆍ이동영 ㆍ김윤대 감독과 함께 미로동화를 창업했다. 미로동화에서는 직접 작품을 창작하고 제작할 여건이 안 돼 외부 작품을 받아 작업했다. 이때 일본 도에이에서 ‘캡틴픽쳐’라는 작품을 의뢰받았고, 기존의 3등신에서 6등신으로 그림체를 변경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당시에는 경영 마인드라는 것이 없었어요. 그림만 그리는 애니메이터가 모여 회사를 창업했으니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와 동료들이 미로동화를 창업했던 때가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역사에 있어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일본 작품들이 대거 국내로 들어오면서, 그에 맞춰 애니메이션 관련 업체가 하나둘씩 생겨나며 애니메이션 붐이 조성되기 시작했던 겁니다.”
보람 가득했던 애니메이터로서의 삶
강광신 감독은 동료들과 3년간 미로동화를 운영했지만 사정이 좋지 않아 1980년 동서동화에 입사했다. 재미교포의 하청회사인 동서동화에서는 미국 디즈니사의 작품을 많이 작업했다. 이어 84년에는 한미합작 회사인 테이크 원에 입사했고, 삼양동화의 창설 멤버로도 활동했다. 86년에는 미림아트사 동업 설립, 87년 화인아트사 입사, 88년 TOPANI사 설립을 거쳐 89년부터 한호흥업에서 일했다. 그후 현직에서 물러나기까지 40여 년의 세월을 오직 애니메이션 제작에 바쳤다. 강광신 감독이 만든 작품은 바바파파, 스큐래피, 스누피, 스머프, 아르센루팡, 코난 등 수십 편에 이른다.
“지금 돌이켜봐도 홍길동과 호피와 차돌바위 제작에 참여한 것은 큰 영광이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애니메이션이 태동할 때부터 중흥기, 그리고 쇠락기까지 경험한 야전 애니메이터로 살았습니다. 평생 애니메이터로서의 한길을 걸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한 가지 미련이 있다면 제 작품을 남기지 못한 것이죠. 당시 환경이나 여건을 생각하면 만화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어려움을 모두 극복하고 작품을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후대에 제 이름을 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발전에 더 도움이 될 만한 흔적을 남기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강광신 감독이 걸어온 애니메이터로서의 40여 년 세월은 개인의 이력이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의 빛과 그림자이기도 했다. 그는 후배들을 위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지금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에 대한 처우가 다른 업종에 비해 아직도 열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선배로서 가슴이 아픕니다. 하지만 후배 여러분, 어려운 현실을 극복해 자신을 극기하고 연마하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반드시 자신의 작품을 하나쯤 남기겠다는 꿈을 가슴에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월간 <아이러브캐릭터> 2019.07월호
<김민선 편집장>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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