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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의 레이아웃과 원화는 한 장의 작화지 위에 2~3개의 연속 동작을 복합적으로 겹쳐 그리고 동작 진행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달았다. 배경은 황정희 화백이 그렸으며 한국의 전통적인 산수와 가옥, 색채 등을 세밀하게 표현했다. 표준 배경과 팬 배경으로 나누어 전체 배경 매수는 총 369장 그중 표준 배경이 312장, 팬 배경이 55장, 애니메이션 배경 2장으로 구성됐다. 홍길동 대본의 전체 페이지는 표지를 제외하고 90페이지로 돼 있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다음과 같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이조 중엽, 태조 이래의 이씨 왕업은 바야흐로 그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으나, 한편으로 지방에서 날뛰는 탐관오리들은 죄 없는 백성들을 함부로 못 살게 굴기도 하여 어지러운 세상 물정은 아직 가시지 않고 있었다. 당시의 이조판서 홍씨의 가문은 대대로 명재상을 낳는 이름난 집안이었는데, 홍 판서와 시비 춘섬과의 사이에 태어난 서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을 길동이라 불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기 계시는 활빈당 동지들의 힘이 컸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감사합니다. 홍길동 장군 만세! 활빈당 만세!"





홍길동은 한국 최초의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일 뿐 아니라 우리만의 이야기와 캐릭터로 만든 한국적이면서 역사적이고, 민족적이면서 문화적 정체성까지 생생하게 담아낸 작품이었다. 일본이 만화영화를 통해 제국주의를 합리화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추구한 것처럼 우리는 홍길동으로 우리의 색깔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이 일은 모든 애니메이션 예술인들의 일치단결된 개척자적 정신과 예술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1967년 1월 28일자 동아일보는 ‘만화영화-전망과 가능성, 홍길동이 던진 문제점, 뒤졌지만 낙관적, 난제는 칼라, 동작 창안’이란 표제어 아래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한국 최초의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이 나옴으로써 우리나라에서도 극 만화영화의 가능성이 얼만큼 제시되었다…. 그러나 만화영화에는 많은 난관이 있다. 그 첫째는 제작비가 다른 영화보다 더 많이 든다는 것으로 홍길동은 3,500만원으로 보통 극 영화의 약 5배가 들었다. 거기에 기술적인 난관도 많다. 아직은 우리나라 만화영화의 유일한 개척자인 만화가 신동헌 씨는 첫째 칼라의 기술적인 채색 문제를 애로로 꼽는다.
1967년 1월 21일, 홍길동이 개봉되자 만화영화 제작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다. 조선일보는 ‘전망 밝은 만화영화’라는 표제어 아래 다음과 같이 평했다.


세기에서 제작한 만화영화 홍길동은 요즘 개봉과 더불어 관객 동원에 성공하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장편 만화영화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홍길동의 만화영화를 총감독한 만화가 신동헌 씨는 100명 이상의 화가와 채색원이 세 달이나 걸려 그린 1만매의 그림을 못 쓰게 되었을 때는 매우 괴로웠다고 말하면서 가장 큰 난관은 이 방면에 대한 기술적인 면이었다고 지난 일을 회상했다…. 현재 세기에서는 1년에 2편씩의 만화영화를 제작할 계획이라고 하며, 금년에도 아동들의 하기 방학 중에는 홍길동 후편을 일반 흥행에 붙일 예정임을 말했다. 최초로 제작하여 흥행에서도 다대한 성과를 거둔 이 만화영화에 대한 관심은 매우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고 모든 사람들이 그 전망을 밝게 보고 있는 것이고 보면 우리나라에도 만화영화의 붐을 이룰 날이 올 것 같다.
당시 제작진에는 감독-신동헌, 각본ㆍ구성-신동우, 진행-신동철, 기획-조규진, 제작-우기동, 총진행-용유수, 원화-정욱ㆍ김대중ㆍ유성웅ㆍ배영랑ㆍ강광신ㆍ김윤대, 동화-백홍기, 배경감독-황정희, 배경-박희종ㆍ박용치, 촬영-박성근, 촬영보조-조민철, 음악-전정근, 효과-최형래ㆍ구성천ㆍ이춘광, 채색-김수아ㆍ안정아ㆍ김미라ㆍ김준복ㆍ한두성 등이 참여했다. 성우의 대사 녹음은 홍길동 역에 김수일, 차돌바위 김정원, 백운도사 이우영, 홍 판서 이춘사, 엄가진에 염석주가 참여했다.





애니메이션 촬영 카메라는 초기에 춘사 나운규가 사용하던 영화 카메라를 일부 개조해 대용하거나 대영영화사의 35mm 카메라도 활용했으나, 이후 국립영화제작소와 미공보원(USIS)의 영화 기자재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전원춘 기사가 별도로 미첼(일명 코첼) 방식의 카메라를 국내에서 제작해 홍길동 촬영에 사용했다.(1966년 홍길동을 촬영 중인 신동우 화백의 사진 참고)


세기상사 촬영소의 상호 로고는 세기촬영소(世紀撮影所)로, 주로 한문 世紀商事株式會社를 사용했다. 영문은 The Century Company, Limited.로 표기했다. 마크는 원형 행성의 테두리 주위에 타원이 있는 디자인이다. 만화영화 제작부는 동화부라고 했다.


만화영화 홍길동은 이미 제작에 들어간 상태에서 1966년 12월 19일 국립영화제작소에 영화제작 작업 의뢰서를 제출해 늦게나마 허가를 얻어낸다. 의뢰서의 내용을 보면 제작자는 세기상사의 사장인 우기동(이후 대종상에도 수여자가 우기동으로 표기됨), 감독 신동헌, 촬영 박성근으로 기록돼 있다. 또한 전체 필름의 척수(Footage)는 35mm 필름 7권, 네가필름 3,660척, 70분으로 구성됐으며 제작 완료 일정은 1966년 12월 30일까지로 정했다. 실제 상영 일자는 1967년 1월 21일이었다.
만화영화 홍길동은 영화가 성공한 후 수익의 10분의 1을 지불하기로 한 제작사의 약속 파기로 인한 우울하고도 슬픈 기록을 간직하고 있다. 당시 장편 제작비가 300만 원 정도였는데 6개월간의 기록적 흥행에 비해 신 화백은 세기상사로부터 180만 원밖에 받지 못하는 불이익을 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 신 화백은 세기상사를 떠나 합동영 화사와 손잡고 홍길동의 후속편 격인 호피와 차돌바위(1967년 9월 제작, 대영동화 촬영)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큰 수익을 보지 못하자 신 화백은 장편 만화영화계를 잠정적으로 떠난다. 이후 1980년에 캐나다의 최대 창작 애니메이션 제작회사인 넬바나(Nelvana-필자도 애니메이터로 근무함)의 레이아웃 파트에서 6개월가량 일하다가 귀국해 1983년부터 MBC TV 1분짜리 아동 프로그램 뽀뽀뽀를 10년간 제작하게 된다.


이남국
·전 홍익대 조형대학디자인영상학부 애니메이션 전공교수
·전 월트디즈니 & 워너 브러더즈 스튜디오 감독 및 애니메이터
·국립공주대학교 영상예술대학원 게임멀티미디어학과 공학석사
·CANADA SENECA COLLEGE OF APPLIED ARTS & TECHNOLOGY
출처 : 월간 <아이러브캐릭터> 2019.07월호
<아이러브캐릭터 편집부>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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