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오형제, 신조인간 캐산, 꿀벌 해치의 모험, 개구리 소년 왕눈이 등은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텔레비전 수상기 앞으로 불러 모은 대표적인 애니메이션이다. 이들 작품뿐 아니라 수많은 작품의 외주 제작에 참여하며 당시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에 활력을 불어넣은 정병권 감독을 만나 그가 들려준 보람됐던 시간과 추억하고 싶은 시간들을 정리해 소개한다.




일본의 공상과학 만화영화 독수리 오형제(원제: 과학닌자대 갓챠맨)를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주제가 도입부에 나오는 경쾌한 멜로디 ‘슈파~ 슈파슈파~ 슈파’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979년 국내에 방영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독수리 오형제는 정병권 감독에게 있어 주제가 멜로디처럼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1972년 유니버셜 아트를 설립한 정병권 감독은 당시 애니메이션 시장의 규모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던 일본에서 독수리 오형제에 대한 외주 제작 사업권을 따내며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사업을 시작했다.
“일본 최초의 TV애니메이션 시리즈인 철완 아톰이 1963년 만들어졌고 이를 계기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산업이 부흥합니다. 더욱이 애니메이션이 큰 인기를 끌자 완구 산업도 동반성장하며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게 됩니다. 이러한 메카니즘 속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은 부침 없이 성장하지만 한편으로는 작품 제작에 참여할 인력이 부족해지면서 해외시장에 관심을 두게 되죠. 그럼에도 그들은 한국 시장을 크게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본은 애니메이션을 문화산업으로 여기면서 한국인들이 그것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다고 봤던 겁니다.”
일본 외주 작업의 물꼬를 튼 독수리 오형제
정병권 감독은 1970년대 초반, 콧대 높던 일본의 만화 제작업체로부터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자신이 제작한 CF 영상 필름을 독수리 오형제 제작사인 타츠노코 프로덕션에 보냈다.
그는 유니버셜 아트를 설립하기 전인 1960년대 중반부터 국내 기업체의 CF 영상을 다수 제작하며 전문성을 키웠고, 이를 통해 경쟁력 또한 갖추고 있었다. 1969년에는 내무부 치안국(현 경찰청)의 5분짜리 방첩계몽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영상 자료를 해외로 반출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필름 한 토막이 나가도 중앙정보부의 검열을 받아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치안국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지만 선례가 없어 안 된다고 하더군요. 애니메이션 붐이 일어난 일본에서 작품을 들여오면 외화 수익도 늘고 일자리도 느는데, 왜 못하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두꺼운 책을 사서 가운데를 도려내고 필름을 그 속에 담아 일본으로 보냈죠. 당시 일자리가 부족해 사정이 좋지 못한 애니메이터 선후배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함께 밥이라고 먹고 살아야겠다는 오기로 그렇게 했던 것이죠.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옵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업체로부터 기술력을 인정받은 정병권 감독은 마침내 독수리 오형제의 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작품을 수주하게 됐다고 해서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다. 독수리 오형제의 러닝타임이 무려 30분에 이르는 TV 방송용 애니메이션으로 기획된 만큼 매월 처리해야 할 작화 분량이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정병권 감독은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사재를 털었고,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여기저기 손을 내밀어 끌어모은 사업 자금을 합쳐 수십 명의 애니메이터를 고용했다.
“독수리 오형제는 한 회당 컷 수가 대략 4,500에서 6,000컷 정도였습니다. 수십 명의 애니메이터가 참여해도 기한을 맞추기가 쉽지 않은 분량이었지요. 고된 작업이었지만 그 과정을 극복하면서 일본 업체와의 신뢰를 쌓아갈 수 있었죠. 한 번은 타츠노코의 일본 내 외주제작 업체중한곳이 물량을 맞추지 못해 우리 쪽에 추가 의뢰가 들어왔고, 불가능해 보였던 분량을 거짓말처럼 해내면서 그들이 우리의 역량을 재평가하기도 했었지요.”
TV 유치원 하나 둘 셋의 교육용 애니메이션 제작
유니버셜 아트는 이후 신조인간 캐산, 타임보칸 시리즈, 꿀벌 해치의 모험, 개구리 소년 왕눈이 등 수많은 작품에 참여하며 애니메이션 제작 역량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이 호황을 누릴수록 국내 외주제작 업체 사이에 경쟁도 커져갔다. 제작 단가는 점점 낮아졌으며 숙련된 인력을 빼가는 사례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회사 손실이 커서 문을 닫는 업체도 나왔다. 정병권 감독의 회사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서 빗겨갈 수 없었다.
“회사를 시작하면서 외주제작은 5년 만 하자고 다짐했었죠. 제 작품을 만들겠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외주제작에 몰두하다 보니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더군요. 빚만 늘어가고 있던 상황이라 사업에서 손을 떼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습니다.”
1980년 정병권 감독은 사업을 접은 후 대홍기획, 제일기획, 오리콤 등의 광고 대행사에서 스토리보드 작화를 맡아 일했다. 젊은 시절의 CF 연출 경험과 사업체 운영을 통해 쌓은 작화감독으로서 능력이 빛을 발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90년에는 유아 교육 프로그램인 KBS TV 유치원 하나 둘 셋의 30초 분량짜리 교육용 애니메이션 ‘개구쟁이 고마 고미’를 제작했다. 개구쟁이 고마 고미는 9년간 1,743회 방송됐고, 다양한 주제와 참신한 소재를 선보이며 시청자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다.
“제가 처음 CF를 제작할 당시에는 전문 모델도 없고 카피라이터도 없었습니다. 그때와 비교해 오늘날 제작 환경은 괄목할 만큼 변화했고 성장했지요. 하지만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의 미래를 긍정적으로만 전망하기에는 조심스럽습니다. 최근 세계 거대자본의 유입과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양적·질적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의 애니메이션 산업이 향후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에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정부 지원 정책을 검토하면서 이에 대한 업계와 정부 차원의 준비를 서둘러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출처 : 월간 <아이러브캐릭터> 2019.10월호
<아이러브캐릭터 편집부>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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