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에 가는 길이었다. 두바이에서 환승하려고 기다리던 중 우연히 튀르키예로 단체 여행을 가는 일행 곁에 머물게 됐다.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자연스레 열기구의 이미지가 떠올 랐다. ‘난 언제 그 열기구에 탈 수 있을까? 붕 떠올라 풍경을 내려다보는 것 이상의 것을 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인연으로 보게 된 영화가 바로 ‘귤레귤레’다.
나이가 늘면서 삶과 동떨어진 영화는 마음에 잘 닿지 않는다. 이제는 버릴 시간이 점점 없어지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재미로 무장한 영화가 무섭기까지 하다. ‘귤레귤레’는 내 시간을 스크린에 잡아두고, 상영 시간 동안 여러 기억과 감정을 꺼내게 만든다. 삶과 붙어 있는 영화는 보는 내내 주마등이라는 경험을 준다.
내 경험과는 다른 항로를 걸어가는 인물들을 통해 오히려 내 삶의 형태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귤레귤레’는 새롭게 만나기 위해 ‘떠나보내는’ 영화였다. 늘 싸우고 포기하고 가끔은 안하무인처럼 굴고 ‘왜 그랬을까, 왜 그러지 못했을까’ 후회하며 그 모든 감정이 내 연대기와 함께 흘러간다.
현실적인 이야기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우연은 과거의 현실적이지 않은 일들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이혼 후 이혼의 원인을 찾아내 이혼 전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정화와 병선은 영화 시작부터 짜증이 나는 대화를 이어간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누군가 몰래 찍어 영화처럼 보여준 적 이 없기에 남이 보는 나를 내 눈으로 목격한 적이 없다. 목격한 적이 없는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행동에 관계와 태도에 대한 정답이 있을지 모른다.
내가 나를 목격할 수 있는, 수식이 없는 이 숙제는 병선과 정화의 모습을 통해 삶의 모습을 등골 서늘하게 유추한다.
여행을 떠나는 공항에서 만난 신혼부부와 중년 부부의 짜증이 영화 속으로 옮겨와 있었다. 그들이 가장 행복했을 때의 모습 은 그들을 다시 화해하게 할 것이다.
영화 속의 정화는 병선과의 행복했던 일을 하나도 뱉어내지 못하지만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 대식과의 대화에서 웃음이 되살아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시간이 더 주어진 만남과 시간이 덜 주어진 만남은 다른 것이다. 아는 대표님에게 얘기한 적이 있다. “우리가 사이좋은 이유는 일을 같이 안 해서”라고.
시간은 무언가를 꼭 남긴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지 않기에 살아봐야 아는 운명을 타고났다. ‘귤레귤레’는 그런 운명에 도움이 되는 영화다.
작품 속에는 시종일관 분위기에만 집착하는 병선이 나온다. 분위기를 좋게 하기 위해, 분위기 좋으니까, 분위기가 이따위라서. 분위기의 다른 말이 기분이라면, 오로지 기분만 신경을 쓰는 병선은 그래서인지 술이 좋다. 분위기만을 좋게 할 수 있으니까. 분위기 안의 마음을 보지 않는다.
직장 상사 원창은 즉흥적이면서도 악의는 없지만 안하무인이다. 모든 대사가, 모든 말투가 길 가다 만난 그리 친하지 않은 동네 사람에게 말하는 듯하다. 한잔 하고 잠들면 그만인 것이다. 나와 방금 대화를 나눈 사람의 마음을 눈치챌 마음이 없다.
정화와 대식을 제외한 이들이 끊임없이 쏟아내는 말 속에는 분명 미안하다는 뜻이 있다. 정화와 대식은 그 많은 말 안에서 정작 스스로에게 미안했던, 스스로에게 하는 사과를 찾아가게 된다.
첫사랑의 기억이 주는 것은 지긋지긋한 삶의 답답함에 주는 각색된 응원이다. 나에게 미안해서 앞으로 미안하지 않을 태도로 바뀌어가는 느낌이다.
고봉수 감독이 펼쳐놓은 이 인물 군상을 보면서 영화가 끝나 갈 무렵 떠오른 노래가 있었다. 가수 이태원 님의 노래 ‘솔개’ 다.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 잃어버린 나의 얼굴아 애드벌룬 같은 미래를 위해 귤레 귤레(gule gule).”
그렇게 각자에게 살아가는 생각을 하도록 하고 감독이 엔딩곡으로 택한 허희경의 ‘그렇게 살아가는 것으로’는 영화 속 이야기를 관객 자신의 이야기로 넘어가게 해준다.
대사들이 좋았다. 서로 싫어하는 말을 내뱉으며 꼬리를 무는 대사들이 중간중간에 ‘아차!’싶은 깊이를 주었고 웃기지만 ‘왜 저 말이 맞지?’하는 언어의 재미가 캐릭터를 살렸다.
배우 신민재 님을 보고 매우 놀랐다. 개인적으로 연상호 감독과 젊은 날의 인연이 있는데 둘이 너무 닮아서였다. ‘닮은 사람이 저렇게 연기를 잘하면 어떤 느낌일까?’하는 생각에 부럽고 무서웠다. 웃기려고 연기한 것이 아닌데 웃길 때 대단했고 짜증 나는 상 황을 더 짜증 나게 해서 놀라웠다.
자매 엄마 역을 맡은 배우 김수진 님은 그냥 현지에서 진짜로 여행 오신 분을 섭외했나 할 정도였다. 배우 이희준 님의 단호하지 못한 삶을 연기하는 머뭇거림이 좋았다.
가시 같은 말을 내뱉고 날씨 같은 인생을 탓하고 또 사랑 같은 말을 다시 내뱉는 것이라는 가사처럼, 귤레귤레는 그럴 때 하는 인사다. 이 영화를 본 이들이 애드벌룬 위에서 그럴 기회를 얻길 바란다.
“유튜브에서 여행 관련 영상을 즐겨 보는데 튀르키예 카파도 키아의 벌룬에 관한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벌룬에 올라 가장 높은 곳에 다다랐을 때, 감정이 격해져 우는 유튜버의 모습을 보고 ‘귤레귤레’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땅과 멀어지는 가장 낭만적인 이동 수단이 벌룬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땅을 바라보며 인사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주인공인 대식과 정화는 모두 과거와 현재를 놓지 못하는 인물이에요. 전 이 영화를 통해 반드시 한 번쯤은 마주해야만 하 는 과거와 현재의 상처를 직시하고 한발 나아가고자 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그리고자 했습니다. 나아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정답은 없다는 사실을 전하며 각자의 삶을 응원하는 따뜻한 메시지를 담고 싶었어요.”
고봉수 감독
“이전까지 주로 힘들게 일해 온 것 같은데 ‘귤레귤레’를 촬영하면서 어려운 와중에도 즐겁게 일하는 법을 배웠어요. 아마 좋은 동료들을 만나 함께한 덕분이겠죠. ‘귤레귤레’는 열기구로 유명한 튀르키예 카파도키아에서 촬영한 영화입니다. 각자가 놓지 못하는 어떠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예요. 영화가 끝나면 관객들께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당신이 놓지 못하는 건 무엇인가요?”
최이슬 프로듀서
안재훈 감독
<소중한 날의 꿈>, <아가미>와 한국 단편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메일꽃·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소나기>, <무녀도>를 개봉했다. 현재 장편 애니메이션 <영웅본색2>, <시작하는 나의 세계> 연출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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