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훈 감독의 영화편지] 이 영화를 보았더라면, '광장'

안재훈 기자 / 기사승인 : 2026-01-05 14: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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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내가 자네를 어떻게 믿나?”
작품 속 모든 인물은 이 말을 직접적으로 혹은 우회적으로 이야기한다. 믿는다는 말의 힘이 아닌 의심의 힘을 믿어야 하는 사회에서 이 영화는 믿음보다 더 어려운 감정인 사랑, 그리고 신뢰에 대한 고민을 던지며 인간이 겪는 고립과 외로움의 여러 형태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누군가와 비교하여 현실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작품 속 색감, 구도, 음악, 등장인물들의 절제된 움직임을 통해 그 특유의 공기를 만들어 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자연스럽고 풍성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 못지않게 움직임을 적절히 통제하는 신을 연출하는 일 또한 매우 어렵다. 움직임이 풍성하지 않다는 건 애니메이션이 아닌 것 같은 직업적 위화감을 주기에 많은 연출자가 ‘그냥 움직이게’ 만드는 선택을 하곤 한다.


그러나 움직임을 통제하고 절제하는 방식이야말로 한국 애니메이션의 맛과 멋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애니메이션 용어 홀드(hold)와도 다른 작법이다. 이러한 연출을 이미지와 감각으로 만들어 낸 작품이 바로 광장이다.

 

주인공은 스웨덴 대사관의 서기관 이삭 보리. 그는 평양에서 근무한다. 임기를 채운 보리는 다른 이들이 평양 근무를 기피한다는 이유를 들며 스스로 근무 연장을 선택한다.

 

물론 그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보리는 평양 시민이자 교통 보안원인 서복주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위험하며, 지속되기 위해서는 복잡한 조건들이 따른다. 어느 한쪽의 희생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보리의 주변에는 늘 감시가 따라붙고 서복주가 살아가는 세계는 삶 전체를 통제한다. 보리와 서복주의 사랑은 시작부터 난관을 안고 있다. 그 난관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보리의 통역관 리명준은 보리에게 일정 이상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통제된 사회’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보리를 감시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 보리를 하나의 ‘관찰 대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가 목격하는 보리의 행동은 통제된 사회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바로 인간다움이었다.


통제된 사회에서 사랑에 빠진 보리의 불안, 미래의 불확실성, 감시 속에 갇힌 삶. 이 이야기는 보리, 복주, 명준이라는 세 인물을 중심으로 감시와 통제, 금지된 사랑, 정체성의 위기를 다룬다.

 


감독의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지만 광장을 유영할 수밖에 없는 외로움이 장면 곳곳에서 드러나는 방식이 좋았다. 광장도, 계단도,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 속의 평양이 주는 선입관을 다른 방향으로 바꿔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집중하고자 했다.


“길이 있는데 어떻게 사람이 안 다닙니까”라는 복주의 대사는 그 한마디만으로 두 사람이 처한 복잡한 상황을 특수성이 아니라 일반성이란 범주에 밀어 넣는다. 그들의 갈등은 어디에서든 사랑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난제들을 보여주는 듯했다.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환경을 겪어온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슬프고도 무거운 대사였다. 그래서인지 작품 속에서 미래를 기약하는 말들은 너무도 당연하기에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이 작품은 북한을 소재로 삼을 때 흔히 따라붙는 일반적인 시선을 벗어나 있다. 제도나 정치가 중심이 되는 대신 작품은 외로움, 감시 사회 속 개인의 고립감, 금지된 사랑이라는 정서를 담아낸다.


평양은 외로움을 가두는 공간으로 사용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북한이라는 소재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일 수 있음을 새롭게 확인한다. 정치적·군사적 요소에 집중하여 극적 서사를 전개하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외로움은 또 다른 방식으로 북한이라는 공간을 인지하게 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점을 드러낸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고립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과도한 포장 없이 절제된 연출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보는 동안 쓸쓸한 시 한 편을 읽는 듯한 기분을 주었다.

 

앞선 글이 광장이란 영화에 다가가는 데 도움을 주는 감상에 가까웠다면, 이번에는 광장이 애니메이션 작품으로서 갖는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는 어떤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할까. 할리우드의 자본도, 일본의 장인 정신도 아닌, 이미 두 나라가 가져간 힘을 모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그 답은 감독의 태도와 마음, 그리고 그 감독이 지닌 빛깔에 있다. 모두를 만족시키겠다는 마음과 단 한 명에게라도 깊이 닿는 마음을 품는 것. 그렇게 각자의 노력이 차곡차곡 쌓일 때 어느 날 우리는 ‘누구’를 만들고 또 ‘어떤 작품’을 만들게 될 것이다.


그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금 창작자가 지니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작품의 빛깔과 인상이 매우 중요하다.


광장은 그 미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적어도 이 작품은 감독과 대화를 나누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다. 우리와 연결된 시대를 만나고, 그 시대 안의 사람을 바라보려는 시선이 담겨있기에 앞으로 우리가 쌓아가야 할 한국 애니메이션에 중요한 디딤돌이 놓였다는 인상을 준다.


광장은 극장에서 보아야 한다. 소비의 형태는 매우 중요하다. 관객이 어떤 소비자가 될 것인가는 중요하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업계와 학교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접근한 애니메이션을 반드시 보아주었으면 한다.

 

 

“광장을 한 문장으로 소개한다면, 아주 두꺼운 콘크리트 벽에 작은 균열이 나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영화입니다. 또한 불가능의 가능성을 말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남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통일을 바라보는 제 시각이 담긴 영화이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로맨스의 외피를 둘러싸고 있지만, 그 포장지를 벗겨내면 명준이라는 인물이 보입니다. 그를 통해 풍문 속에 살지 않고 진리를 찾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김보솔 감독

 


안재훈 감독
<소중한 날의 꿈>, <아가미>와 한국 단편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메일꽃·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소나기>, <무녀도>를 개봉했다. 현재 장편 애니메이션 <영웅본색2>, <시작하는 나의 세계> 연출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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