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웹툰 작가가 있다. 그는 2년 전부터 AI 툴을 작업에 도입했다. 배경 초안을 생성형 이미지 툴로 먼저 뽑은 후 거기에 직접 선을 얹고 색을 보정했다. 덕분에 배경 작업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그런데 얼마 전 새 클라이언트가 이런 말을 했다. “AI 쓰시잖아요? 그럼, 작업비 좀 조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작가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일을 그렇게 시킬 거면 직접 하든가.’
이 생각이 무례하게 들리는가? 한번 따져보자. AI 툴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미드저니도, 스테이블 디퓨전도, 클로드도, 챗GPT도 누구든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발주자는 스스로 하지 않고 창작자를 찾는가? 제대로 된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맡기는 것이다. 툴을 다루는 것과 툴을 활용해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드는 건 전혀 다른 능력이다. 그리고 그 능력의 값이 바로 제작비다.
시대가 바뀌었다. 그런데 무엇이 바뀐 건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AI가 창작 현장에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일부 공정이 빨라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AI 덕분에 제작비가 낮아져야 한다는 결론은 보고 싶은 것 중에서 절반만 본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말은 작업 방식이 바뀌었다는 뜻이지, 창작자 역할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AI 시대의 창작 현장에서는 새롭게 생겨난 노동이 있다.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비용만 깎으려 한다면 결국 그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잘못된 출발선 위에 놓이게 된다.
AI 도입 이후 만화·애니메이션 업계의 실제 워크플로
아래는 실무 현장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변화다. 무엇이 대체되었고, 그 결과 무엇이 새롭게 필요해졌는지 함께 봐야 한다.
배경 작업
이전에는 배경 한 컷을 손으로 그리는 데 숙련 어시스턴트 기준으로 2∼4시간이 걸렸다.(펜과 잉크의 시대 때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들었다) 지금은 생성형 이미지 툴로 초안을 뽑는 데 10분이면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비용이 줄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실제 현장에서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AI가 생성한 배경은 작품의 세계관, 선 굵기, 채색 스타일, 원근감 처리 방식과 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을 작품에 녹아들도록 보정하고, 캐릭터와 어우러지게 조정하고, 일관성을 유지하는 작업을 새로 진행해야 한다. AI 초안은 소재일 뿐이다. 그것을 완성된 컷으로 만드는 판단과 손길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콘티와 연출
스토리보드 자동화 툴이 등장하면서 대략적인 장면 배치를 빠르게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감정을 어떤 앵글로 보여줄지, 컷과 컷 사이의 호흡을 어떻게 설계할지, 이 장면이 전체 서사에서 어떤 무게를 가져야 하는지는 AI가 판단하지 못한다. 오히려 툴이 빠르게 초안을 만들어주므로 그것을 읽고 판단하고 수정하는 연출가의 속도와 안목이 더 중요해졌다. 연출비는 줄어든 것이 아니라 요구되는 밀도가 높아진 것이다.
채색과 리터칭
AI 채색 툴은 이제 꽤 쓸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AI로 채색하면 80%까지는 금방 끝나도, 나머지 20%를 완성할 때 손이 많이 가서 걸리는 시간은 예전과 비슷하다.”캐릭터의 피부톤 일관성, 특정 장면의 감정을 살리는 조명 처리, 머리카락의 결 표현, 의상의 소재감 같은 세세한 묘사는 여전히 사람의 손을 타야 한다. 그리고 클라이언트가 수정을 요청할 때, AI가 처리한 영역과 손으로 작업한 영역이 뒤섞여 있으면 수정 난도가 오히려 올라갈 수도 있다.
음성과 더빙
AI 보이스 합성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시제품 단계에서는 AI 음성으로 먼저 테스트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흐름이 성우의 보수 협상에 이상하게 활용되기 시작했다. “AI로도 되는데 왜 이 금액이냐”는 식이다. 하지만 AI 음성은 감정의 층위가 없다. 대사 한 줄에 담기는 긴장감, 주저함, 아이러니, 침묵 직전의 떨림 같은 건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 표현을 완성하는 것이 성우의 역량이다. SAG-AFTRA가 디지털 복제와 AI 음성 재현에 동의와 보상 조항을 명문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기획과 프롬프트 설계
AI 시대에 새롭게 생겨난 노동(?)이 있다. 프롬프트를 설계하는 일이다. 어떤 키워드로 어떤 스타일을 불러낼지, 생성된 결과물 중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떤 것을 버릴지, 여러 툴을 어떤 순서로 조합할지 등은 창작적 판단이다. 숙련된 창작자일수록 이 과정이 빠르고 정확하다. 하지만 발주자 입장에서는 이런 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화면 앞에서 클릭 몇 번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노동이 아니다.

또 다른 창작자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혼자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감독이 있다. 그는 2D 애니메이션을 혼자 기획하고, AI 툴로 러프 프레임을 만들고, 직접 클린업하고, 음악은 무료 라이선스 소스에 자신의 편집을 더해 완성한다. 그렇게 만든 단편이 해외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상을 받았다. 그 소식이 알려지자 어떤 제작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저희 프로젝트도 그렇게 만들어줄 수 있나요? 예산은 혼자 만드셨을 때와 비슷하게 잡겠습니다.”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그 작업은 1년에 걸쳐 제 기준으로 제 방식대로 만든 겁니다. 발주 작업은 요구사항이 있고, 수정이 있고, 납품 기한이 있습니다. 같은 가격으로는 불가능합니다.”제작사 담당자는 당황했다. 혼자 만들었으니 당연히 그 가격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오해의 구조는 다른 데서 온 게 아니다. 개인 창작과 발주 작업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창작자의 유연함을 발주자의 권리로 착각하게 된다.
비용을 줄이고 싶다면 요구를 줄여야
제작비를 아끼는 방법은 창작자를 압박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젝트를 명확하게 정리하고, 수정 횟수를 줄이고, 피드백을 일관되게 내리고,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는 데서 시작된다. AI 시대에도 이 원칙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AI가 개입된 작업일수록 초기 방향 설정이 더 중요하다. 방향이 흐릿하면 AI가 생성한 결과물이 쌓일수록 수정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작자에게 이것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당신의 유연함은 서비스가 아니라 배려다. AI 툴 덕분에 어떤 공정이 빨라졌다면, 그 시간을 더 좋은 결과물을 위한 완성도에 쓰는 것이 맞다. 절약된 시간이 그대로 할인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툴이 바뀌었다고 해서 당신이 가진 안목, 연출력, 세계관을 구축하는 능력, 납품에 대한 책임이 줄어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AI 시대 창작 보수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정리하면 이렇다. 창작 보수는 기본 창작비에 더해 권리비, 리스크 관리비, 그리고 재사용·학습 허락비를 따로 산정해야 한다. 같은 작업이라도 1회 게시용인지, 독점 사용인지, 캐릭터 데이터나 음성 샘플이 AI 모델 학습에 쓰이는지에 따라 보수는 완전히 달라진다. 한국저작권위원회도 생성형 AI 활용 저작물의 권리 판단과 분쟁 예방을 별도로 다루고 있다. 미국 저작권청은 2025년 보고서에서 AI 학습 사용 문제를 독립적 쟁점으로 명시했다.
툴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인간의 기여가 얼마나 있었느냐가 기준이다. 그리고 그 기여의 값을 정하는 것은 발주자가 아니라 그 기여를 이해하는 창작자와 발주자가 함께 해야 할 일이다.
앞으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기술의 변화를 핑계 삼아 누군가의 노동을 지우려는 시도에 맞설 언어다. AI가 속도를 높여주었다면, 그 속도는 더 좋은 작품을 위한 여유로 써야 한다. 그 여유를 발주자의 할인 근거로 삼는다면 창작 현장은 빠르게 단순 소모의 구조로 바뀔 것이다.
일을 그렇게 시킬 거면 직접 하면 된다.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창작자를 찾는 것이고, 그 이유가 바로 제대로 된 보수를 지급해야 하는 근거다.

김한재
·강동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콘텐츠과 교수
·애니메이션산업, 캐릭터산업, 만화산업 백서 집필진
·저서: 생성형 AI로 웹툰·만화 제작하기(2024) 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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