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인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 중단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의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이 갑작스레 중단됐다. 1999년 개관과 동시에 탄생한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이 23년 만에 끊긴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누군가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공식 명칭이 아니고, 지난해 지원사업에 선정된 작품들도 올해까지 지원금을 받을 것이라고 반박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에게는 지금까지 줄곧 써 온 센터의 제작지원이란 말이 더 익숙하기에 그대로 사용하려고 한다. 지난해 약속한 지원금을 지급하는 것을 두고 올해도 지원이 계속된다는 변명에 대해선 굳이 설명하고 싶지도 않다.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의 눈부신 성과
1999년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지원된 금액은 약 40억 원. 다른 사업에 비해 지원금 규모가 크지 않지만 그간의 성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2000년대 초반에는 국산 단편 애니메이션이 해외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됐으나 이제는 해외 영화제에서 한국 작품을 찾아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연상호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이 세상에 나온 것도 제작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진 정다희, 정유미 감독도 제작지원의 수혜자였다. 단편 제작을 시작으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차리거나 장편을 만드는 감독들도 센터의 제작지원으로 활동 기반을 마련했다. 한 영화제의 1년 예산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원금으로 이 정도의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게 놀라울 뿐이다.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의 성장
얼마 전 열린 칸 국제영화제에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로 문수진 감독의 각질이 단편경쟁에 초청된 데 이어 안시 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최초로 학생 부문 대상인 크리스탈을 수상하는 낭보를 전했다. 또한 안시에서 홍준표 감독의 첫 장편 태일이도 장편 콩트르샹(Contreshamp) 부문에서 심사위원 스페셜 멘션을 수상하면서 한국 애니메이션의 위상을 높였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쾌거가 단순히 특출 난 인물 한 명이 만들어낸 게 아니라 그간 한국의 독립애니메이션이 성장해오면서 낳은 결과라는 점이다.
문수진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10대 때부터 단편 작품들을 보면서 꿈을 키워왔다고 말했다. 홍준표 감독은 명필름에서 자신의 단편을 보고 태일이를 함께 작업하자고 연락이와 참여하게 됐다고 했다.
이렇듯 좋은 작품은 좋은 토양에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다. 다양하고 수준 높은 작품들이 있었기에 한국 애니메이션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좋은 소식을 들려줄 수 있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토양을 만드는 데는 제작지원 제도의 역할이 컸다.
일본 작가들조차 부러워하는 한국의 제작지원 제도 애니메이션 강국이라고 알려진 일본에서조차 한국의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 제도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일본에서 한국 독립애니메이션에 관해 강의를 하다 보면 꼭 나오는 질문과 요청하는 내용이 바로 한국의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 제도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작가들을 위해 지원하는 제도가 일본에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 학교를 졸업한 이후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애니메이션 하면 떠오르는 나라이기에 이러한 사실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지만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많고 다양한 작가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단편 애니메이션 지원은 미래를 위한 투자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은 과학에 비유하자면 기초과학 연구 지원과 같다. 단편 애니메이션은 산업 발전의 탄탄한 발판을 마련해주고 다양한 연출과 기법, 새로운 스토리텔링 같은 실험들이 가능한 장르다. 실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신예 제작사들이 단편을 만들었던 감독들로 구성됐거나 단편을 만들고 있는 곳이란 점이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서울산업진흥원(SBA)은 민간인이 운영하는 기업이 아니다.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공기관이라면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한 사기업처럼 경제적 성과만을 강조하며 이미 시장이 형성돼 있는 사업을 지원해 열매를 얻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 투자나 지원이 취약한 분야를 눈여겨보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은 계속돼야 한다
SBA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이 없어지는 건 단순히 지원사업 하나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실제 올해와 내년에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을 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감독들은 동요하고 있다. 앞으로 작업을 지속할 수 있을지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창작활동을 이어가려고 하는 작가들에게 가장 큰 힘과 버팀목이 돼준 건 이 제작지원 사업이다. 2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어져왔기에 사업에 대한 작가들의 신뢰가 크기도 했다. 그러한 사업이 하루아침에 예고도 없이 사라진다는 소식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필자는 이 제작지원 사업이 없어진다면 과연 우리나라에서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하는 작가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려한다. 세계 주요 영화제 상영 및 수상 소식과 함께 단편 작가들의 스튜디오가 성장하고 장편 제작 등 애니메이션산업의 새로운 미래의 문이 열리려고 하는 이때 지원 중단이란 비보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제작지원이 다시 이어지길 바란다. 유통지원은 제작지원 없이 성립할 수 없다. 무엇을 유통한다는 말인가. 새로운 상영회나 영화제보다 제작지원이 급선무다. 예산이 한정돼 있다면 더욱 그렇다. 예산이 부족하다면 힘을 모아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도 있다. 어떻게든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지원이 지속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면 좋겠다.
최유진
· (사)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사무국장
· 인디애니페스트 영화제 집행위원장
· 애니메이션페스티벌 심사위원·자문위원 활동
아이러브캐릭터 / 최유진 사무국장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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