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전수전은 물론 공중전까지, 현실에서 갖은 수난을 겪고 불명예 전역 후 배달 일을 하며 살아가는 자발적 아웃사이더 이산아. 그녀는 팔자를 바꾸기 위해 무당 동생과 아기동자를 만나 조상신들이 사주를 관장하고 있다는 영적인 세계로 모험을 떠난다. 이진화 감독이 단독 연출한 첫 작품 <그 여자의 사주팔자>는 변화를 다짐했지만 현실의 벽에 갇혀 힘겨운 분투를 이어가는 이들에게 건네는 한 모금의 청량제다.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올 3월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 제작연구과정을 마쳤다.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들의 작업을 틈틈이 도우면서 그간 못 봤던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드라마를 몰아보고 있다.
<그 여자의 사주팔자>는 어디에서 영감을 얻었나?
나와 주변인들의 삶을 보면서 여성과 무속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한 동창들을 만나면 종교가 있는 친구들까지도 점 보러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엄마 세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선언하던 주체적인 80년대생 여성들이 결혼하고 회사를 다니고 아이를 낳고, 또는 낳지 못하고 부딪히는 벽에 대해 하소연할 곳이 없는 현실, 다 알면서도 그 길을 간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이라 믿고 스스로 짊어지지 않으면 누구도 해결해 주지 않는 사회와 가정 속에서 점을 보러 가는 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스트레스라도 풀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다양한 사례를 찾아봤다. 이 과정에서 미래가 막막하고 고립된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한 사이비 무속인들의 범죄에 관한 소식도 접했다. 언젠가 그렇게 사회의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는, 사회와 법적 구제의 구조에서 외면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30대 초반 잠시 한국을 떠나 있던 사이 미투 운동처럼 다양한 움직임이 일어나 세상이 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변화의 흐름을 이끌던 당사자들은 하루하루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는 모습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 주인공들이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어떠한 판타지가 필요할까, 그러한 모습을 풀어가며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 싶어 ‘그 여자의 사주팔자’를 만들었다.
첫 작품을 완성한 소감이 어땠나?
실습 작품, 공동 연출, 프로듀서로 참여한 작품을 제외하면‘그 여자의 사주팔자’가 첫 단독 연출 작품이다. 그동안 뭔가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작가의 가치관이 담긴 포트폴리오를 차곡차곡 쌓지 못한 상황이라 많이 게을렀다는 생각이 든다. 스태프로 작품에 참여할 때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했기에 개인 작품을 완성한 소감이 특별히 다르진 않은 것 같다. 다만 작품 속 이야기가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내 손을 떠난 작품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참 궁금하다. ‘그 여자의 사주팔자’는 7월 3일부터 13일까지 열리는 제29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처음 공개한다. 오롯이 내 목소리를 담은 작품이라 매우 떨리고 긴장된다. 관객들과 만날 수 있게 돼 매우 감사하다.
애니메이션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언제였나?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러가 되고 싶어 국문과에 들어갔는데 해외 봉사 활동을 다녀온 후 언어를 뛰어넘어 감동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다양한 영상 분야의 스토리텔링에 대해 공부했다. 그러다 한겨레문화센터 애니메이션제작학교에 들어가 장형윤, 연상호 감독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짧은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인디애니페스트에서 상영할 기회를 얻어 영화제에 갔는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다 모여있는 걸 보고 애니메이션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의 작품을 포트폴리오 삼아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얻는 즐거움은?
세상의 많은 행위가 어쩔 수 없이 소멸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움직임이라고 생각하는데,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생명을 만들어내는 행위에 한 발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 든다. 현실의 아픔을 잊을 수 있는 공간에서 새로운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고 순수한 진심이 소통되는 모습을 사랑한다.
준비 중인 차기작이 있나?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가?
혼란의 시기에 한국을 떠난 20대 여성이 홀로 서호주의 대자연을 여행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중편 애니메이션이다. 또 오래전 공동 연출로 장편 과정을 진행하다 그만둔 ‘커피의 신’이라는 이야기도 다시 써보려 한다. 한동안 여러 연유로 글을 쓰지 못해 답답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 여자의 사주팔자’를 마친 지금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 행복하다. 다음에는 스토리 자체로도 완성도 있는 작품을 기획해 보겠다.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는 상업적인 시도도 더 많이 해보려고 한다. 그중 하나가 ‘그 여자의 사주팔자’의 스핀오프를 만드는 거다. 주인공들이 팔자원정대가 돼 팔자를 고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돕는 이야기다.
아이러브캐릭터 / 장진구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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