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뭐였지? 낯선 결제들의 총합, 충격의 월세 수준
언젠가 카드 명세서를 열어보고 기함했다. Midjourney Inc, OpenAI, Anthropic, PBC, Canva PTY, Eleven Labs Inc., Luma AI, Inc. 등 낯선 이름이 줄줄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혹시 스팸 결제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니 다 내가 필요해서 구독해둔 AI 툴의 흔적이었다.미드저니, 챗GPT, 루마, 클링, 일레븐랩스, SUNO, 캔바, 캡컷, 클로드…. 이름만 불러도 숨이 찰 정도로 많은 서비스가 매달 꼬박꼬박 디지털 월세를 걷어 가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유목민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 필요할 때마다 새로운 툴과 플랫폼을 찾아 떠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작업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이곳저곳에 뿌려놓은 구독료만 합쳐도 작은 방 하나 월세쯤은 거뜬히 나올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이 과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느샌가 자유로웠던 유목민에서 월세를 꼬박 내는 세입자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콘텐츠 제작자는 더 힘들다
특히 콘텐츠 제작자에게는 이 구독 문제가 더 심각할 수밖에 없다. 웹툰 작가, 영상 제작자, 음악 크리에이터, 강의자료를 준비하는 강의자, 심지어 SNS 운영자까지, 창작자들은 점점 더 AI 기반 종합예술인처럼 되어가고 있다.
이미지를 뽑으려면 미드저니를 켜고, 영상을 만들려면 클링이나 루마를 켜고, 대본을 다듬으려면 챗GPT나 클로드에 묻고, 목소리는 네이버 클로바 더빙이나 일레븐랩스로 변환하고, 배경 음악은 유디오나 SUNO가 담당하고, 편집은 캡컷으로 마무리한다.
어떤 프로젝트든 이 순환 고리를 따라가다 보면 결제 항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문제는 한번 발을 들이면 ‘이 툴 없이는 못 한다’는 중독적 의존성이 생긴다는 거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도 챗GPT 플러스는 못 끊겠어요. 논문 쓰는 속도가 3배는 빨라졌거든요. ”대학원생들의 투정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물론 무료 버전만 써도 충분하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공통된 결론은 하나다. 직접 써본 사람일수록 기꺼이 돈을 낸다는 사실. 효율성이 주는 달콤함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디지털 월세,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다
디지털 월세라는 말은 단순한 밈이 아닐 게다. 과거 소프트웨어는 한번 사두면 영구 사용이 가능했다. 포토샵 CD를 사면 몇 년이고 쓸 수 있었고 워드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구독형으로 전환되고 있다. 사용자는 소프트웨어를 소유하는 대신 매달 임대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건 개발사 입장에선 장기적 수익을 확보하는 좋은 방식이지만 사용자 입장에선 새로운 부담이다. 매달 나가는 고정비는 마치 전기세, 수도세처럼 생활비에 포함되어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넷플릭스는 약과’라며 AI 툴에 내는 월세를 더 크게 체감하고 있다.
구독 피로가 현실이 된 이유
국내 통계만 보더라도 지난해 전체 구독 서비스 지출이 전년 대비 17% 증가, 그중에서도 AI 구독은 무려 300% 폭증했다고 한다. OTT와 음악 스트리밍만 합쳐도 월 4만원대인데, 여기에 챗GPT와 미드저니를 더하면 월 6만∼7만 원은 기본이다. 한 달은 금세 지나가고 ‘이 툴을 이달에 제대로 쓰지도 못했는데…’라는 자책도 따라온다. 그럼에도 끊지 못하는 건 ‘이달에는 남은 거라도 다 쓰고 해지해야지’결심했다가 또 잊고 다음 달로 넘어가 버리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구독 피로(subscription fatigue)라고 부른다. 꼭 필요한 툴이라고 시작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비용 대비 활용도가 떨어지거나 중복되는 기능의 서비스가 겹쳐 쓰이면서 생기는 피로감이다.
결제 관리라는 또 다른 함정
더 골치 아픈 건 결제 관리다. 대부분의 청구서는 툴 이름이 아니라 회사 이름으로 찍힌다. OpenAI, Canva PTY, Eleven labs Inc.…. 이렇게 나오니 얼핏 보면 스팸 같기도 하고, 어디서 새 나가는 건지 헷갈리기도 하다. 게다가 결제일이 서비스마다 제각각이라 카드 명세서를 꼼꼼히 보지 않으면 유령 결제가 몇 달째 빠져나가도 모른다. 계정 관리도 번거롭다. 어떤 건 구글 연동, 어떤 건 자체 계정, 결제 해지를 하려면 다시 계정 페이지에 들어가야 한다. 다 쓰지도 않는 구독을 놔두는 건 결국 시간과 돈 모두 낭비가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중요한 건 균형이다. 모든 툴을 다 챙겨 쓰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쓰자니 뒤처진다는 불안이 생기기 때문에 끊어도 되나 하는 고민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몇 가지 현실적인 대안을 정리해 봤다.
1. 리스트업과 주기적 다이어트
지금 쓰는 모든 구독을 목록화하자. 그리고 분기마다 한 번씩 실제로 쓰는가, 아니면 마음의 위안용인가를 객관적으로 점검하자. 버려야 할 건 과감하게 버리는 게 답이다.
2. 예산 상한선 설정
스스로 ‘AI 툴 구독은 월 00만 원까지만’이라는 룰을 세워두면 새 툴을 추가할 때 기존 것을 해지해야 할 것이다. 자연스레 우선순위가 정리될 수 있다.
3. 통합 관리 서비스 활용
요즘은 구독 관리 앱이나 은행 앱에서도 정기 결제를 한눈에 보여준다. Rocket Money 같은 해외 서비스나 카드사별 정기 결제 알림 기능을 적극 활용하면 깜빡하는 구독을 줄일 수 있다.(여기에서도 또 구독을 유도하는데 그냥 엑셀이나 한글 파일에 직접 정리하자. 아 참, 이제는 MS나 한글도 구독이다.)
4. 계정 공유와 할인
지인과 계정을 나눠 쓰는 것도 방법이다. GPT 계정을 5∼6명이 나눠 쓰면 1인당 월 7,000원 수준으로 줄어든다. 물론 이용 약관을 꼼꼼이 확인해야 하고 공유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만 해야 한다.(솔직히 사용자의 이용 습관과 내용이 쌓이며 계정이 개인화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추천하지는 않는다.)
5. 일시 구독과 무료 대안
꼭 필요한 달에만 구독하고 아닐 때는 해지하는 스위치 전략을 추천한다. 오픈소스나 무료 대안을 활용하는 것도 좋다. 완벽하진 않지만 프로젝트에 따라 충분히 쓸만하다. 물론 이렇게 관리하는 것은 웬만하게 꼼꼼하지 않다면 쉽지 않다.
결국 내 손에 달렸다
우리는 지금 디지털 월세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 스마트폰처럼 AI 툴도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시대다. 다만 문제는 슬프게도 내가 주인이 아니라 세입자라는 사실이다. 결국 중요한 건 내가 어떤 방에 머무르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아닐까. 매달 내는 월세가 정말 가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지, 아니면 빈방에 불만 켜둔 꼴인지.
혹시 이번 달 카드 명세서를 아직 안 열어보았다면 오늘이 좋은 날이다. 이 글을 읽고 한번 뒤져보시라. 이건 뭐였더라… 싶은 항목이 있다면 디지털 다이어트를 시작할 신호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을 더 가볍게 만들 수 있는 첫걸음은 늘 결제 내역 속에 숨어 있다.
김한재
·강동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콘텐츠과 교수
·애니메이션산업, 캐릭터산업, 만화산업 백서 집필진
·저서: 생성형 AI로 웹툰·만화 제작하기(2024) 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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