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미: 노 웨이 아웃>
박재범 감독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다.
만들어나가는 동안 쌓이는 많은 순간들이 되돌릴 수없는 프레임들로 남아 마침내 한 편의 애니메이션이 완성된다. <빅 피쉬>, <스네일 맨> 등 자기 안에서 생겨난 의문점들과 안타까움을 피하지 않고 고민하며 이야기를 완성해나가는 박재범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소개를 부탁한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된 계기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박재범이라고 한다. <더미 : 노 웨이 아웃>, <빅 피쉬>와 <스네일 맨>을 만들었다. 어릴 때부터 애니메이션과 만화책을 좋아했고 자연스럽게 창작 욕구가 생겼다. 대학에 와서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기 시작했을 땐 무작정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서 2D, 3D, 실험 애니메이션 등등 할 수 있는 것은 다접해봤다. 그러나 작업 후에 컴퓨터를 끄고 나면 마음이 허전했다. 내가 만들어낸 창작물들은 가상공간 안에서만 머물러 있어서 나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스톱모션을 접했는데 ‘이거다’ 싶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스톱모션에 빠져 있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어떤 점을 가장 좋아하나?
무엇보다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있는 곳에 창작물이 실재하는 것이 스톱모션, 그중에서도 퍼펫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팅을 할 때에도 캐릭터를 손끝으로 만지며 움직이는 동안 교감하게 되고, 그러면 마음이 놓이곤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컴퓨터 작업처럼 되돌리기를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처음엔 큰 단점이라고 느껴졌는데 지금은 정반대로 느끼게 됐다.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매 프레임,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쌓이는 시간들이 매력적이다.
스톱모션으로 만든 첫 작품은?
학부 졸업 작품으로 만든 <더미 : 노 웨이 아웃>이다. 차량 충격 실험에 인간 대신 사용되는 더미 인형인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다. 실험용으로 쓰기 위해 만든 더미 인형은 각종 실험에 사용된 뒤에 폐기 처분되는 것이 운명이다. 이 작품에서는 정해진 운명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빅 피쉬>는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키는 작품인데
<빅 피쉬> 는 엄마 요나가 딸 미카를 찾아 빅 피쉬의 배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무언가 행동하고 싶었지만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수차례 결심 끝에 시작했던 프로젝트인데,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선뜻 함께해주신 덕분에 완성할 수 있었다. 기획 때까지만 해도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나 작업하는 동안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은 작품을 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감정을 간직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폭풍우를 뚫고 딸 미카를 만나러 가는 엄마 요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까지만이 내 역할인 거다. <빅 피쉬> 는 가장 애착이 가는 작업이자 애니메이션을 계속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해준 작품이다.
가장 최근작인 <스네일 맨>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스네일 맨>은 노인인 롯이 손자와 함께 아들을 찾아 둥근 수레를 끌고 거대한 사막을 횡단하는 이야기다. <빅 피쉬>를 제작 하고 난 뒤에도 ‘치유되지 않는 상실감’ 에 대한 고민이 늘뒤따랐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회사 건물 앞에서 리어카를 끌고 지나가는 남성을 보게 됐다. 그는 한쪽 팔이 없었고,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필사적으로 리어카를 끌며 언덕을 올라가곤 했다. 얼핏 달팽이같던 그 모습에서 <스네일 맨> 을 떠올렸다.
작품의 배경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사막 지역이다. 우리와는 멀고 또 묵직하게 느껴진다. 사막을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는?
‘사막’ 이라는 배경이 내포한 고난이 극중 롯의 상실감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 롯과 손자 아람은 아들 모압과의 짧은 만남 이후에야 비로소 그를 떠나보낸다.
그 이후의 삶은 온전히 그들의 몫이겠지만 척박한 환경 속에서 만나는 존재들 자체가 어쩌면 작은 기적일 거라 생각했다. 이처럼 고난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생명의 모습이 사막이 주는 주요한 이미지이자 이야기였다. 사막과 전쟁의 이미지 때문에 현실의 국제 문제를 연상할 수 있지만, 특정 국가를 생각하고 만든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전쟁을 인간 세상에서 찾아낼 수 있는 가장 강한 부조리한 존재로서 표현하고자 했다. 다만, 전쟁을 직접 겪어 보지 않은 만큼 전쟁에 대해 폭력적인 묘사는 하지 않았다.
인형들뿐 아니라 광대한 배경까지 인상적인 작품이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특별히 신경쓴 점이 있다면?
팀 작업의 공이라고 생각한다. <스네일 맨>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정규과정의 졸업 작품으로 1년 동안 약 20명의 제작진과 함께 만들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만들어야 하는 여건상 이야기의 약점들을 인지하고 기획에 신경을 많이 썼다. 제작진과 사막 이미지를 놓고 연구를 많이 했는데, 한 컷을 하나의 그림이라고 생각하면서 꼭 필요한 것만 만들고 찍었다. 원근법을 이용해 공간을 왜곡시켜 구성하는 과정도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는 등장인물도 적고 세트도 간소하다.
그런 점에서 미술과 촬영 및 조명이 중요했고 해당 감독님 들의 역할이 컸다. 팀 작업을 하면 각자 다른 능력이 조화롭게 합쳐졌을 때 큰 힘이 생긴다. 그 힘이 좋아서 나는 늘팀 작업을 선호한다.
작품 전반에서 작고 약한 것,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중요한 테마로 느껴진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가 있다면?
꼭 어떤 메시지를 넣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작업에 임하진 않는다. 오히려 방향은 또렷이 잡고 시작하지만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는 작업 과정에서 찾아가는 편이다. 작품을 할 때마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걸까?’ 하고 계속 고민하게 된다. 애니메이션은 제작 기간이 길다 보니 만드는 내내 고민하게 되고, 그 고민이 일상으로 스며들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내면을 많이 들여다보게 된다. 돌이켜보면, 나는 고난 속에서 일말의 희망을 찾고 싶은 마음이 늘있는 것 같다.
국내 독립 애니메이션 시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독립 애니메이션 제작에는 감독 1인 제작 체제 혹은 소규모 스튜디오 형태가 정착되고 있는 듯하다. 감독 및 소규모 스튜디오들은 단편, 뮤직비디오, 바이럴 영상 등 다양한 수요에 이미 잘 적응하고 있다고 본다. 반면에 조금 더 큰 규모의 작업이나 색다른 기획은 점점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훌륭한 능력을 가진 아티스트들이 현실에 부딪혀 포기하거나 위축되어 있는 모습을 볼 때 안타깝다.
이런 일들은 그들의 의지가 약해서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큰 기업들도 애니메이션 방송총량제 폐지 등의 상황 속에서 숨이 막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아직까지 애니메이션 시장에는 최소한의 울타리가 필요하고 생각한다. 더블어 창작자도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향후 작품 계획은?
현재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엄마의 땅> 이라는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 중이다. 이전 작업들의 과정처럼 이번에도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동안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있다. 또 다양한 능력과 다채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알아가고 있다. 그리고 좀 더 장기적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계속 작업해나가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당면한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하기는 결코 쉽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꾸준히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계속 정진하고 싶다.
박재범 감독
·<스네일 맨> 2019
·<빅 피쉬> 2017
·<더미: 노 웨이 아웃> 2015
출처 : 월간 <아이러브캐릭터> 2020.7월호
<아이러브캐릭터 편집부>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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