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국 교수의 애니메이션 아카이브 28_세계 속의 한국 애니메이션: 근현대사 - 17

/ 기사승인 : 2020-01-02 17: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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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작 홍길동의 후속편 격인 홍길동 장군이 용유수 감독의 지휘하에 1969년 7월 21일에 제작됐다. 용유수 감독은 세기상사의 우기동 사장의 대리인이자 제작 책임자로 한국 애니메이션사에서 많은 역할을 맡아온 원로다. 홍길동 장군은 총지휘에 국채완, 각본에 이두위, 원화 및 구성에 정도빈, 김일남, 촬영에 조민철이 참여했다.
1972년 1월 22일자 동아일보는 홍길동 장군이 브라질의 유수한 영화수입사인 시네마토그라피카 조나리사로부터 수입 의사를 통보받았다고 보도했다.
세기상사는 홍길동 장군을 제작하던 중인 1969년 5월 12 일. 일본 세이키사에서 촬영 카메라와 스탠드를 구입했다.
카메라는 미첼 타입, 촬영 스탠드는 옥스베리 타입으로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장비였다. 이후 홍길동 장군, 왕자호 동과 낙랑공주, 번개 아텀, 괴수 대전쟁 등 4편의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를 제작한다.
당시는 70년대를 전후로 TV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TBC와 KBS, MBC가 일본 TV애니메이션 등 해외 애니메이션을 수입 및 방송하면서 안방극장 시대로 접어들던 때다.
한편 1970년 5월 27일에는 불량 만화 등을 소각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부 불량한 내용의 만화가 있기는 했지만 일괄적으로 만화 전체에 낙인이 찍혔으니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다.
1970년 10월 월트 디즈니에 의해 캘아츠(CalArts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가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 엔젤레스에서 문을 연다. 아티스트들이 필요했던 디즈니는 셔나드 예술학교(Chouinard Art Institute)에서 인재를 발굴했고 디즈니의 나인 올드 맨도 여기 출신이다. 디즈니의 장편 만화영화 미녀와 야수의 감독인 글렌 킨은 캘아츠 A113호 강의실에서 수학했고, 또 픽사의 감독 중에도 캘아츠 출신이 많다. 캘아츠는 존 래세터, 브레드 버드, 앤드류 스탠튼, 팀 버튼 등 수많은 아티스트를 배출했다.
캘아츠는 캘리포니아의 발렌시아에 위치한 사립대학교 캘리포니아 예술 학교의 애칭이다. 1961년 시각예술과 공연 예술을 전공한 학생들을 위해 특별히 만든 고등교육기관이며 미술 학사, 미술 석사, 예술 석사, 미술 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1970년 10월 13일자 동아일보에 ‘미(美)에 월트 디즈니 예대 발족’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린 바 있다. 디즈니는 유언을 통해 캘아츠 설립에 3천만 달러의 유산을 기부 했다.
캘아츠는 1960년대 초반 넬버트 쉬나르를 포함한 많은 후원자들의 뜻으로 설립됐다.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을 위한 공동작업환경이 제공됐으며 학생들은 워크숍 스타일의 학업을 통해 자신들의 작품을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었다.
월트 디즈니는 캘아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캘아츠는 내가 더욱 푸르른 목초지로 나아갈 때 떠나기를 희망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미래의 재능을 개발할 수 있는 곳을 제공하는 일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인가를 성취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월트 디즈니
1970년 7월 7일에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한다. 같은 해 7월 30일에는 디즈니의 장편 만화영화 피터팬이 재개봉한다. 1971년에는 ‘우리 어린이는 불량 만화를 사지도, 읽지도 맙시다’는 플래카드와 함께 불량 만화를 소각하는 일이 있었다.
모든 만화를 무조건 불량한 만화로 매도하던 1970년대 풍토 앞에서 만화는 최대의 시련을 맞이했다. 만화를 불량 출판물로 낙인찍고 만화영화를 불량 영상물로 낙인찍기 이전에 정당한 심의를 거치는 재고의 여지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일어나는 무차별적 매도는 한국 만화와 만화영화의 문화와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를테면 즉결심판에 넘겨져 재판도 없이 사형선고를 판결하고 즉각 사형을 집행한 형국이었다. 당시 어른들은 만화를 나쁜 것이라고 여겼 지만, 사실 그들도 어린 시절에는 만화를 재미있게 보고 즐기며 자라오지 않았던가!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아닌가. 그야말로 한국 만화계가 멸종의 위기를 경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적 창작물의 가치에 대한 무지와 사회적 인식의 결여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또 과거 일본제국주 의가 우리의 이름과 문화, 역사, 신앙, 자유, 창작 등 모든 것을 앗아가고 박탈했던 만행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다는, 책임 주체에 대한 양면성도 결코 간과할 수는 없으리라고 본다.
1971년 1월 7일 세기상사가 제작한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 제6탄,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가 시민회관에서 개봉했다. 셀원화 10만 장이 사용된 이 작품은 약 1년의 기간이 소요됐고 상영시간은 1시간 30분, 컬러 시네마스코프다.
1971년 1월 8일자 동아일보는 왕자호동과 낙랑공주에 대해 “보다 한국적인 것을 어린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명고 얘기로…(중략)…택했다. …(중략)…만화영화 제작의 경우, 그 제작비는 미국이 한화로 5억 내지 10억 원, 일본이 최소 1억 원인 데 비해 한국은 고작 2, 3천만 원 정도 며, 제작 기간도 미국은 3년 걸리지만, 한국에서는 수익성 때문에 1년이라는 시한을 지켜야만 되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다.



 이남국
 ·전 홍익대 조형대학디자인영상학부 애니메이션 전공교수
 ·전 월트디즈니 & 워너 브러더즈 스튜디오 감독 및 애니메이터
 ·국립공주대학교 영상예술대학원 게임멀티미디어학과 공학석사
 ·CANADA SENECA COLLEGE OF APPLIED ARTS & TECHNOLOGY



출처 : 월간 <아이러브캐릭터> 2019.12월호
<김민선 편집장>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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