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고 차분하다고요? 촐랑대는 악역이 더 좋아요 _ 애니메이션 속 그 목소리 _ 성우 류승곤

장진구 기자 / 기사승인 : 2021-10-08 08:5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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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책을 읽거나 고독을 즐기고 어딘가에 자신이 드러나는 것은 싫어한다. 평소 느긋하고 차분하지만 연기만 하면 내면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맛본다는 그에게 성우는 자신의 모순적인 성향을 완벽히 만족시키는 축복과 다름없다.

 

▲ 사진제공: 성우 류승곤

 

간략한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지난 2004년 MBC 공채 17기로 들어와 17년째 성우로 활동 중이다. 조용한 성격이어서 사람을 만나 뭔가를 같이하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성우가 된 직후 이런 성향 때문에 여러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지만 지금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평소 조용히 지내면서 타인과 감정을 활발히 교류하지 않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캐릭터에 이입돼 소리치고 악쓰고 울고 화내는 것에 쾌감을 느꼈다. 덕분에 연기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다.

취미가 독서다. 연기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성우가 연기 해야 하는 대사의 양은 일반 연기자보다 훨씬 많다. 일반적인 연기라면 몸짓 , 표정 , 대사를 섞어 표현하는데 우린 모든 묘사를 말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사량이 많을수록 감정의 포인트를 빨리 파악해 연기에 적용해야 한다. 이때 독서량이 부족하다면 이러한 작업이 힘들 수 있다. 독해력이 좋아야 캐릭터와 대사를 자기 것으로 빨리 만들 수 있다.
대사마다 감정과 의미를 다르게 전달해야 하는 성우는 문장의 의미와 맥락 , 줄거리 , 분위기를 재빨리 파악하는 능력이 훈련돼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서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성우라는 직업을 택한 계기가 있나?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지만 성우란 존재에 대한 인식은 따로 없었다. 평소 “ 목소리 울림이 특이하다 ” , “ 듣기 좋다 ” 란 소리를 가끔 듣곤 했는데 군대에서 어느 날 선임이 내게 “ 목소리가 좋은데 관련 일을 한번 해봐도 좋겠다 ” 며 건넨 말 한 마디를 들은 순간 머리에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상병 때부터 6개월 넘게 발성 관련 책을 찾아보고 방법도 모른 채 정신없이 뛰어들어 에너지를 쏟았다. 제대 후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와 학원을 다니면서 준비한 결과 1년 반 만에 운 좋게 성우시험에 합격했다. 사실 군대 가기 전까지 학생이었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제대 후 곧바로 성우가 된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대표작들을 소개해달라 다른 성우들에 비해 애니메이션을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대표작을 꼽자면 장금이의 꿈이란 작품이다. 왕의 호위무사이던 민정호란 역을 맡았는데 성우가 되자마자 맡게 된 주연급 캐릭터였다. 당시 마이크 울렁증이 심했는데 갑자기 큰 역할을 맡게 돼 어안이 벙벙했다. 정미숙 , 이선주 등 하늘 같은 선배님들 사이에서 녹음하려니 주눅이 들어 대사를 잘 살리지 못해 벌벌 떨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나고 보니 왜 그랬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풋내기 시절 나름 잘해보려 연습하던 그때의 추억이 짠하게 남아 있다. 지금도 주위에서 이 작품을 얘기해주시는 분들이 많은데 내 성우 생활의 기반을 닦아준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 캐릭터를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는가? 선하고 차분한 성향의 캐릭터나 조언하는 역할과 잘 어울린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전속 시절 큰 감정 변화가 없는 조용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는데 프리랜서가 되어서도 비슷한 역할이 주어지는 사례가 많았다. 내가 편하게 낼 수 있는 목소리라서 녹음도 부담없이 했는데 자꾸 하다 보니 재미가 없어지더라. 연기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어 못된 역할을 하나둘 하다 보니 훨씬 흥미롭고 몰입도 잘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요즘은 악역에 재미를 붙였다. 촐랑대거나 촐싹대며 약삭빠른 악역 캐릭터가 잘 맞는다. 대신 덩치가 크고 카리스마가 넘치면서 소리를 잘 지르는 장군이나 보스 같은 느낌의 악역은 힘들다.(웃음)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가 있나? 캐릭터라기보다 장르로 보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 주로 외화 연기다. 전속성우 시절 외화 더빙만 했고 실존하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입히는 작업에 많은 재미를 느껴 외화에 대한 기억이 남다르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Silver Linings Playbook)이란 영화에서 배우 브래들리 쿠퍼가 열연한 팻 솔리타노란 역을 맡은 적이 있다. 외화 더빙을 위한 대본은 보통 녹음 전날 밤 늦게 나오기 마련인데 4차원 성향의 캐릭터를 밤새 연습하는게 무척 재미있었다. 녹음에 들어갔을 땐 그 배역에 확몰입했는데 끝나고 집에 갈 때는 온몸의 기운이 풀려 한없이 나른하고 행복감을 느꼈다. 실제 배우의 표정과 연기를 보면서 목소리를 내다 보니 내 감정을 잘 끌어낼 수 있게 되는 것 같았다.
 

성우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는다면? 나름 중견성우로 활동하고 있으면서도 뭐가 꼭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친화력과 포용력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PD , 팬 , 동료들과 스스럼없이 소통하고 지적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이라고 할까. 어디에서나 활발히 일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와도 허물없이 잘 지내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더라. 또 한 가지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만큼 자기관리와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고 자신만의 특별한 매력이나 장기를 어필해야 성우로서의 생명력이 오래갈 수 있다.
 

류승곤에게 성우란? 내게 잘 맞는 옷을 입고 편안하게 쉬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별다른 사회생활 없이 군 제대 후 성우로 살아오면서 감정의 패턴이나 생활습관 , 몸의 리듬이 성우란 직업에 맞춰졌다. 감정을 드러내기 싫지만 적극 표현하고 싶은 나의 모순적인 성향을 만족시키는 완벽한 직업이어서 인생의 축복과 같다.

 


 

 

 

아이러브캐릭터 / 장진구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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