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 우리가 느꼈던 시선들에 대하여_독립영화관 _ 정해지 감독

/ 기사승인 : 2020-08-20 17: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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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올해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정해지 감독의 졸업작품인 <수라>의 시상 소식이 전해졌다. <수라>는 간결한 아트워크와 담담한 대사로 청소년의 낙태에 대한 세상의 시선, 이를 겪어야 했던 이들의 감정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작품이 관객들을 논쟁이라는 길로 이끌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감독은 시종일관 객관적인 태도를 담담하게 유지했다. 그 덕분에 작품은 더욱 단단해질 수 있었다.


소개를 부탁한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된 계기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정해지다. 어릴 적부터 만화를 좋아해서 한예종 애니메이션학과로 진학했다. 사실은 종이 만화책을 더 좋아했지만, 애니메이션 학과에서 여러 가지를 배우다 보니 ‘이왕이면 제대로 만들어보자’ 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그야말로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다. 지금은 애니메이션이 없는 미래는 생각할 수 없다.


<수라>가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학생졸업작품 부문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또 자그레브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 학생 부문 경쟁작에 초청됐다. 이번 수상과 초청이 어떻게 다가왔는지?

정말 기뻤다. 졸업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작업이었는데, 이렇게 상을 받을 줄 몰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도움을 주셨던 분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나 혼자만으로는 어려웠을 텐데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에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이제는 욕심이 생겨서 본격적으로 배우고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 <수라>에 대해 소개해달라. 작품의 영감은 어디서 얻었는지?

수라는 미성년자의 임신과 낙태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난해 4월 낙태죄가 위법으로 판결되며 많은 시위가 벌어졌다. 그걸 보다가 학창시절 실제로 겪었던 친구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게 됐다. 고등학생 시절 친한 친구가 갑작스럽게 임신해서 그로 인해 겪는 일들을 지켜본 적이 있다. 어렸기 때문에 충격도 컸다. 당시 나와 친구는 그저 산부인과에 앉아 있었을 뿐인데, 앞자리의 할머니가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 왜 기분이 안 좋은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산부인과에 오는 미성년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 그래서 이 작품을 내가 아직 학생일 때 만들어야만 한다고 생각 했다.


<수라>는 작품에서 등장하는 백석의 시 제목이기도 하다. 제목의 의미는?

수라는 불교 용어로 싸움을 부추기는 귀신의 세계를 뜻하고, 또 혼란스러운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백석의 시 중 ‘수라’ 라는 작품도 있는데, 이 시가 내포한 의미를 포함해 당시 나와 친구가 겪었던 상황을 표현하는 데에 걸맞다고 생각했다. 그중 백석의 시 ‘수라’ 의 화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거미 가족을 뿔뿔이 헤어지게한 것에 대한 슬픔을 말하고 있다. 내가 그린 이야기에서 소녀는 임신을 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가족을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낙태를 선택한다. 세상의 차가운 시선이 주는 압박과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에 소녀의 공동체는 시작하기도 전에 해체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시와 맞닿는다 생각해서 시와 작품을 접목시켰다.


임신을 한 소녀가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친구의 시선을 따라간 이유는?

처음에는 임신한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당사자가 아닌 만큼 그 감정들은 어떻게 표현해도 다 담아낼 수 없을 거라고 결론짓게 됐다. 그래서 화자를 친구로 바꿔 이야기를 진행시켜보니 관객들도 친구의 시선을 따라가면 더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관객들이 친구의 감정과 동화된다면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거란 기대도 들었다. 완성하고 나서는 더욱 확신이 들었다. 만약 임신한 소녀를 화자로 했다면 관객들의 감정 소모가 커서 관객들이 지치고 힘들었을 것이다.


<수라>는 간결한 아트워크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아트워크 부분에 대해서는 시행착오가 매우 많았다. 졸업작품으로 만든 것이라 교수님과 의논할 기회가 많았는데, 기획 초기 단계에서부터 아트워크를 하나씩 잡아나가야 했다. 처음에는 선보다 면으로 표현하려고 했고, 다양한 색감으로 톤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야기의 결과 어울리지 않는 듯해서 많은 것을 수정해야 했다. 예를 들어 학교의 정경은 매우 심플하게 그려졌다. 주인공이 교실에서 선생님에게 호명돼 시를 읽는 장면이 나오고 바로 다음 장면이 학교 정경인데, 묘사에 조금만 디테일이 들어가도 주인공의 공허한 마음이나 임신한 친구에 대해 느끼는 여러 감정이다 무너지는 것이었다. 결국 최대한 디테일을 빼고 여백을 주며 완성한 것이 해당 장면이다. 이처럼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많은 분들이 아트워크를 좋게 봐주셔서 무척 감사했다.


매우 상징적인 작품인데, 관객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길 원했는지?

수라를 만들 때 가장 노력했던 부분은 객관적인 시선을 갖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 수라는 내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가기 쉬웠다. 그렇지만 내 개인적인 의견 때문에 논쟁을 야기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작품을 보고 난 관객들이 낙태에 대한 찬반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기로에 섰던 어린 소녀가 처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배경, 그 모든 일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을 한 발짝 벗어난 곳에서 보며 좀 더 다양한 생각을 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드는 사람인 내가 객관적인 눈으로 이야기를 끌어가야 했다. 제작 기간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작품을 보여주고 그들의 반응을 통해 내가 맞게 가고 있는지 계속 확인해보곤 했다.


작품에 대한 영감은 주로 어디에서 얻는지?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만화를 더 좋아했고 실제로 작업도 했었다. 예전에 만든 만화는 가까운 곳에 사시던 위안부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만든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이번 수라도 낙태법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만들어 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반드시 사회적 문제를 다루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의 일상에는 언제나 사회적인 문제들이 있지 않나. 그중에서 내 마음에 무언가를 던지는, 생각했던 것을 확 떠오르게 하는 사건들이 있어야 비로소 만들고 싶어지는 것 같다.


국내 독립 애니메이션 시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나라에 실력이 뛰어난 작가와 감독들이 매우 많은데, 그들이 빛을 보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시장 자체가 협소하고 지원도 받기 힘드니까. 1인 체제 감독과 소규모 스튜디오들이 활약하고 있긴 하지만, 작품성은 좋은데 금전적 지원이 적다 보니 퀄리티가 좋아지기 힘든 듯하다. 다른 일을 병행하며 작업하다 보면 한 작품을 만드는데 드는 시간도 너무 길어지는데, 그런 부분들이 안타깝다. 

한편으로는 최근 왓챠에서 다양한 독립 애니메이션을 볼수 있어 긍정적으로 느껴진다. 왓챠에 올라온 반응들을 보니 생각보다 독립 애니메이션을 재미있게 봐주는 이들이 참 많더라. 이처럼 학생 작품을 포함해 좋은 작품들을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는 공간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앞으로의 계획은?

내게 애니메이션은 내 미래라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성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독립 애니메이션만 만들어서는 생계를 유지 하기 힘들며 부수적인 일을 지속해야 작품을 계속 만들 수있는 상황이다. 그러니만큼 이제는 독립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는 내 모습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직업을 넘어선 그야말로 내 미래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선 서른 살까지는 무조건 작품에만 몰두하고 싶다. 그 이후에는 다른 일을 병행하며 제작해야겠지만, 그전까지는 근본적인 고민 없이 몰두해서 좋은 작품 서너 개를 만들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정다희 감독님을 매우 존경하고 있다. 활동을 꾸준히 하실뿐 아니라 작품 모두 하나같이 훌륭하다.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는 걸까?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독립 애니메이션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할 것이다.



정해지 감독 

·<수라> 2020




출처 : 월간 <아이러브캐릭터> 2020.8월호
<아이러브캐릭터 편집부>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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