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중반 만화 잡지 보물섬에서 인기리에 연재한 달려라 하니가 40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왔다. 악역이었던 나애리와 라이벌 하니의 진심, 함께 달리는 즐거움을 깨닫는 과정과 꿈을 향해 달리는 이들의 서사에 화려한 스트리트 러닝 액션을 더한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는 전편의 후속이 아닌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다.

장편 데뷔작이자 화제작이라서 소회가 남다를 텐데
20년 넘게 일했는데 극장판 감독을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나라 여건상 극장판을 만들 기회가 별로 없거니와 기획할 때부터 이슈가 된 작품이라 더 값진 경험이었다. 제작진이 열성을 다한 덕에 무사히 완성할 수 있었다. 사실 영화를 만들면서 계속 자책했다. 연출이 부족한 부분이 눈에 밟혀서, 몰라서 놓치고 알면서도 못했던 작업들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이런 애니메이션이 꼭 필요하다는 사명감으로 이 정도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 것에 만족한다.

감독을 처음 제안받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국산 2D 애니메이션이 적은 상황에서 하니 IP를 되살리는 시도는 분명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우려먹기 아니냐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을 거라 여겼다. 나 역시 회의감이 있었다. 그런데 나애리를 주인공으로 해보자는 소리에 흥미가 생겼다.

하니란 캐릭터는 매력적이지만 사람들의 기억과 조금이라도 엇나가면 낯설게 느껴질 거란 생각에 부담감이 정말 컸다.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원작 그 이상을 보여주겠다는 포부 대신 잘해야 본전이니 본전만 찾자는 각오로 제작에 임했다. 내가 추구한 건 어릴 적 꿈과 희망을 준 만화영화의 느낌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조금 유치하고 말도 안 되지만 신나고 재밌고 유쾌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연출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부분은?
나애리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다. 고정관념이나 관성 같은 것일 수 있는데 시나리오를 쓰고 스토리보드를 구성할 때 하니 위주로 구도를 잡게 되더라. 나애리 보다 하니가 더 익숙하니까. 연출할 때 나애리 중심으로 화면을 바꾸는 작업도 꽤 많았다. 이러다 나애리가 공동 주연으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하니의 존재감에 묻히지 않도록 나애리를 부각시키는 작업에 시간을 많이 썼다.

나애리는 이번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롭게 거듭난 캐릭터다. 하니는 디자인부터 스토리까지 이미 완성돼 기억에 각인된 캐릭터라면, 나애리는 악역으로 소비된 것 외에 채워진 게 별로 없는 캐릭터였다. 영상에서 나애리가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격렬히 달릴 때 일시적으로 느끼는 긍정적 감정)를 느끼는 장면을 완성했을 때 비로소 나애리가 주인공인 영화가 됐다는 걸 실감했다.

신스틸러인 홍두깨와 고은애를 어떻게 보여줄지도 관건이었다. 처음에는 분량이 많았는데 다 쳐내야 했다. 이들의 분량 때문에 논쟁도 있었으나 설정한 러닝 타임과 이야기 주제에 맞추려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육상부 설정부터 시작해 할 얘기가 더 많았는데 조연들의 분량이 줄어든 게 못내 아쉽다.

스트리트 러닝 액션 연출이 어렵진 않았나?
길거리 달리기는 나중에 생각해 낸 아이디어였다. 원래는 트랙 위를 달리는 내용이었는데 재밌는 화면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애니메이션답게 상상력과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위해 길거리 달리기로 설정하면서부터 이야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러닝 액션을 연출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떻게 연출해야 스토리와 감정이 달리기로 이어지게 할 수 있을지가 가장 중요했다. 나애리, 하니, 주나비의 달리기 스타일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에도 신경 많이 썼다. 나애리는 단단하면서도 예쁜 인조인간, 하니는 작고 빠른 살쾡이나 고양이, 주나비는 야성적이고 위협적인 흑표범 같은 느낌이 들도록 했다. 다만 제작 여건상 3D 기법을 마음껏 활용할 수 없어서 좀 아쉬웠다. 공간의 원근감을 더하고 카메라 워킹이 훨씬 자유로워 연출도 더 다이내믹해질 수 있었는데 말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관객 반응은?
시사회가 끝나고 어느 한 관객이 나가면서 “생각보다 재밌는데?”라고 중얼거렸다. 그게 딱 내가 원하는 반응이었다. 관객들이 새로운 걸 기대하진 않을 거라 여겼던 내겐 최고의 피드백이었다. 김세윤 영화평론가가 라디오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나와 작품을 상세히 설명해 줄 때도 정말 감사했다. 어떤 관객이 SNS에 한글 간판과 서울 거리가 배경으로 나와 좋았다는 글을 올린 걸 보고 일본 작품이 아니라 우리나라 작품에도 이런 니즈가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기도 했다.

후속편이 나올 계획이던데 새로운 버디 무비의 시작인가?
비슷하다. 이번 영화는 나애리와 하니가 이렇게 변했고,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챙기고 함께 성장하는 두 캐릭터를 소개하는 것이었다면 속편은 부산을 무대로 펼쳐지는 달리기를 통해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청춘 소녀들의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다. 둘의 라이벌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절친이라고 마냥 훈훈하진 않다. 10대 소녀들의 감성 요소를 더 집어넣어 성장하는 청춘 소녀들의 스포츠 영화란 느낌을 더 강조해 보겠다. 두 소녀의 열정적인 달리기를 계속 보여주고 싶다. 이번에 미흡했던 부분을 보완해 다른 스토리로 꼭 다시 찾아오겠다.
아이러브캐릭터 / 장진구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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