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시작부터 무지개 깃발이 등장한다. 다양성과 자긍심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깃발이 펄럭이고,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는 무지개가 뜬다. 돌려 말하지 않겠다는 선언. “나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다”라는 결의. 혹시 내가 놓치고 이해하지 못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라는 단단한 결의가 있었다.
최은영 작가의 단편 ‘그 여름’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던 기억이 있다. 사랑의 아름다움과 사회적 시선으로 인한 두려움, 그리고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 쉽게 오해라고 말할 수 없는 관계의 어려움들. 그 작품은 사랑의 형태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이해하고자 하는, 성숙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소설이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졌다. 잘 알지 못할 때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조심스러움을 조금 덜 조심스럽게 만들고, 평범하다거나 자연스럽다는 말이 아닌 ‘자연스러움’자체에 대해 ‘이반리 장만옥’은 크게 한 발짝 나아가게 했다.

이 작품은 판타지다. 시시한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갑자기 춤을 추고, 진지하고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즐거운 연출로 나아간다. 만옥은 자신이 운영하는 레인보우 카페를 퀴어 행사의 뒤풀이 장소로 내준다. 누군가를 위한 일이기도 했겠지만, 한편으로는 조그만 이익을 기대하는 마음 또한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후배의 “돈 때문”이라는 말에 그 일을 행하던 만옥의 마음속 한 부분을 들켜버린다. 그렇게 어머니의 죽음과 맞물려 만옥은 고향 이반리로 향한다. 긴 터널 끝에 보이는 이반리의 빛은 희망일까, 신기루일까. 무엇이라도 해야만 하는 만옥은 고향에서 크고 작은 마을 일에 참여하게 되고, 마을 어른들과 공동체 사람들 속에 어렵지 않게 섞인다. 그곳에서 만옥은 그저 ‘레즈비언 장만옥’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 ‘장만옥’이었다. 하지만 이런 만옥에 대해 알고 있는 전남편이자 마을 이장은 만옥이 불편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제거하려고 한다.

결국 만옥은 자신을 쫓아내려는 이장과 배타적이고 편견 어린 고향 사람들 앞에서 이장 선거 출마를 선언한다. 동네 사람들은 만옥을 지지하는 쪽과 이장을 지지하는 쪽으로 나뉜다. 그 안에는 ‘재연’이 있다. 재연은 이장이 재혼해 낳은 아들로, 만옥의 레인보우 카페처럼 자기만의 작은 공간을 만들어 숨 쉬고 있는 인물이다.
오랜 시간 시선과 편견을 견디며 살아온 중년의 만옥은 이제 자신과 비슷한 시선과 편견 속에서 살아가게 될 재연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준다. 그리고 결국 이장 선거는 마을 주민들만의 싸움이 아니라 서울에서 올라온 응원군들까지 뒤섞인 선거전으로 번져간다.

남성 이장에 도전하는 여성 장만옥. 그리고 레즈비언으로서의 도전. 하지만 애초에 동네 이장 선거는 거창한 정치력이나 대단한 권력이 필요한 자리가 아니다. 만옥은 그저 얼굴 두껍게 끝까지 ‘맞짱’을 뜰 뿐이다. 만옥의 정체를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는 이장은 그 사실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무기처럼 사용한다.
‘무녀도’의 모화 역시 무당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유언비어와 편견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을 깎아내리고 흠집 내는 일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를 넘어 시대마다 다양한 형태로 계속 존재했기에 우리는 다양성의 건강함을 이야기하게 된다.
중년의 레즈비언 여성이 공동체의 대변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순간, 별문제 없어 보였고 모두 좋아 보였다가 돌변하는 공동체와 이를 헤쳐 나가는 만옥과 친구들의 연대를 그리는 이 영화는 웃음도 함께 넣었다. 잠시 턱을 괴고 심각하게 바라보는 대신 한번 크게 웃으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보자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장 자리에 남녀가 어디 있냐?”라는 말처럼 종교적 반대파와 지지자들이 충돌하는 장면은 마치 인도 영화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노래 시퀀스처럼 뜬금없이 터진다. 그 장면은 결국 같은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왜 서로 싸워야 하는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감독의 도전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이것이 독립영화만의 해학 아닐까. 어떤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반리는 만옥이라는 존재를 통해 도시에서도 여전히 논쟁거리인 문제들을 들추고 그 안에서 어떤 과정을 만들어 낸다. 고등학생 재연이 만옥을 통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용기를 얻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는 일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난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해왔던 일들, 자신의 모습 그 자체로 맞서는 건 누군가에게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되어준다. “뒤지기 전에 해보고 싶은 걸 해봐”라는 말을 만옥에게 듣게 될 때. 재연은 힘든 일들을 겪는다.
가끔 누군가 힘겹게 만들어 놓은 혜택을 당연하게 누리면서도, 언젠가 우리 모두 겪을 수도 있는 삶의 불편은 상상하지 못한 채 무조건적인 반대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교육을 많이 받았느냐와는 별개로 생겨나곤 하는데, 이반리에 만옥이 들어오고 그 안에서 조금씩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나 역시 어떤 문제들 앞에서 가장 먼저 이해하는 사람은 아니더라도, 조금 늦더라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내가 가진 본래의 모습을 내 주변 공동체가 범죄처럼, 병처럼 여긴다고 생각하면 나 또한 몹시 힘들 것이다. 이 작은 마을에서 성 정체성이라는 화두를 두고 치러지는 선거는 어쩌면 먼 훗날 우리 사회의 한 장면을 미리 보여주는 듯하다.
새롭게 발견되는 것들, 오랫동안 가졌던 편견을 바꾸게 되는 일들을 애초에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설득할 만큼의 지혜와 지식이 아직 내게 부족하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기도 한다.

그때 결국 내가 믿게 되는 건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태도를 보면 되지 않을까. 만옥이 동네 독거노인을 대하는 태도처럼, 외로워서 아팠던 사람이 다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후배들에게 “미안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만옥의 태도를 보면 되지 않을까.
이 영화를 만나는 순간이 꼭 왔으면 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가 지식이 되고 지혜로워지는 순간이 오기를 바란다. “이 마을에서 외로운 사람이 없는 거. ”만옥의 마지막 대사를 책상에 써두기로 했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출연진이 정말 좋았다. 양말복, 성재운, 박완규, 김정영 색자 배우를 비롯해 모든 출연진이 각자의 개성과 분위기를 갖고 있어 좋았고, 이런 배우들을 더 알게 되어 기뻤다. 크레디트를 한 번 더 봐야겠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곳곳에 뚜렷하게 존재합니다. 저는 혐오와 무관심을 코미디의 힘으로 무찌르고 싶었어요. 웃음이 사람들의 방어를 잠시 내려놓게 만들고, 그 빈틈을 노려 타인에 대한 연민과 응원으로 채울 수 있기를 바라며 시작한 영화입니다. 단, 두 시간만이라도요. 동시에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란 성소수자 청소년 재연에게, 불완전한 영웅 만옥을 선물해 주고 싶었고요.
감독 이유진

안재훈 감독
<소중한 날의 꿈>, <아가미>와 한국 단편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메일꽃·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소나기>, <무녀도>를 개봉했다. 현재 장편 애니메이션 <영웅본색2>, <시작하는 나의 세계> 연출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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