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세기상사는 촬영에 있어 35mm 애니메이션 카메라와 스탠드를 확보하기 전이었다. 당시 대한극장 길 건너 충무로 쪽에 있던 대영 자막실(대영동화제작소)의 원로 박성근, 박성철 두 형제가 미대사관 공보원에 근무하던 전원춘에게 제작을 의뢰해 만든 35mm 스톱모션 카메라로, 조립에 2개월이 걸린 국산 미첼(Mitchell) 타입 카메라를 홍길동 촬영에 사용했다.

미첼 방식 카메라는 1939년도에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과학, 기술상’을 수상한 카메라로 필름을 한 프레임씩 이동시키는 왕복 운동의 간헐 장치와 연동돼 있는 파일럿 핀 또는 레지스터 핀에 의해 영상이 필름 위에 노출, 기록되는 동안 그 위치를 고정시키는 데 있어 뛰어난 정밀도를 지니고 있었으며, 아직도 필름으로 촬영하는 영상물을 제작하는 데 있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1966년 8월 3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월트 디즈니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디즈니랜드보다 더욱 규모가 큰 ‘월트 디즈니월드’를 플로리다 올랜도에 만들 계획을 세웠는데,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뭐? 내가 은퇴한다고?”올해 65세인 월트 디즈니는 은퇴설에 펄쩍 뛰었다. “천부당 만부당한 소리를… 나는 내 생애 최대의 사업을 이제 달성해야 할 단계에 있는데”… 라고 하면서 그의 생애 최대의 목표인 사업은 영화가 아니라 플로리다의 방대한 지역을 개발, 거기에다 새로운 디즈니랜드를 이루는 것. 이른바 미래의 도시인데 여기에는 2만 명의 인구가 수용되고 초현대적인 산업 지구가 건설되는 것 이란다.

1966년 12월 15일 홍길동 제작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한국을 포함한 세계의 여러 나라는 금세기의 위대한 애니메이션 예술가인 월트 디즈니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한다. 디즈니가 영면한 다음 날, 1966년 12월 16일자 경향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미키 마우스의 할아버지 월트 디즈니 씨 별세-어린이들의 벗, 노벨상 후보에도’라는 표제어 아래 월트 디즈니 씨가 15일 심장마비로 말미암아 65세를 고비로 이곳에서 별세했다… 센트 조세프 병원에서 좌측 폐의 절제 수술을 받았고, 지난 5일에는 이 병원에서 그의 생일을 맞이했다… 그는 비록 권력의 자리에 앉은 일이 없을지라도 디즈니랜드의 왕이며, 흥행계의 제왕을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의 수상 후보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었다.

한국일보는 1966년 12월 18일자 보도에서 ‘국왕 서거보다 더 큰 죽음’이라는 표제 아래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할 때 연합군은 그들의 암호로서 가장 친근한 이름을 썼다. ‘미키 마우스’였다… 위대한 생쥐 ‘미키 마우스’를 창조해 스스로가 위대해진 환상의 나라의 왕, 월트 디즈니가 세상을 떠나자 철의 장막 바깥과 안, 어디서나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죽은 것보다 더한 슬픔의 소리가 들려온다. 디즈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앞으로 쉬지 않고 재롱을 피울 미키 마우스와 함께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사망 소식은 당시 한국애니메이션 예술인 종사자들의 가슴에도 깊은 슬픔을 안겨 주었으며 국내 창작에 대해 재차 숙고하는 계기가 됐다.

홍길동이 제작 중이던 1966년에는 광화문 세종로에 지하도가 개통되며 또 다른 역사 기록이 있다. 그것은 동양방송(TBC, 이병철 회장)이 일본 제일동화와 제휴해 TV 연속물인 만화영화 황금박쥐 그리고 일본 NHK 방송국의 작품인 요괴인간의 동화와 채색, 배경까지 제작하게 된 것이다. TBC-TV는 방송국 내에 자체 동화부를 설립하고, 국내 최초로 국제 하청 제작이라는 주문자 상호 부착방식(OEM)의 물꼬를 트게 된다.

1967년 1월 홍길동 개봉에 이어 그해 7월 30일에는 중앙 극장에서 국내 최초로 인형 애니메이션인 ‘흥부와 놀부’가 개봉했다.

흥부와 놀부를 제작한 강태웅 감독은 1929년 황해도에서 출생했으며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일본으로 건너가 1950년에는 니혼대학 예술학부 영화학과에 입학해 덴츠사의 인형영화 제작소에서 모치나가 감독의 도제가 된다. 귀국 후 신동헌 감독이 제작한 홍길동의 성공을 보며 한국 최초의 인형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 1967년 4월 초 촬영이 시작됐으며 그해 6월 15일 촬영을 마쳤다. 1967년 여름방학에 개봉돼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1968년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청룡영화상 비 극영화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흥부와 놀부는 각본을 비롯해 인형 제작, 애니메이팅, 미니어처 무대배경, 소품, 조명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강감독이 제작했다. 20~30cm 크기의 인형(80개)에 상체, 어깨, 허리, 팔, 다리, 무릎, 발 등의 관절과 마디를 만들고 얼굴은 나무로 제작해 눈동자, 눈썹, 입을 움직이게 했으며 발에는 베어링을 넣어 이동이 가능하게 했다. 온종일 작업한 분량이 30초 정도였다고 강태웅 감독은 회고했다. 제작-영필름, 기획-안락진, 각본-조진구, 촬영-김현용, 특수 촬영-김윤중, 특수미술-김계춘·김순동·김일동, 음악-최창권, 조명-김현용·송재갑, 편집-이경자, 스틸-김홍식, 연출보-유병춘, 기록-천경숙·김순동, 현상-한국천연색현상소, 제작-김동식이 각각 담당했다.

1967년 8월 15일 신동헌 감독이 세기상사에서 합동영화사(세간에서는 대영동화사 또는 대동영화사 등으로 돼 있으나 그것은 잘못 알려진 것임)로 자리를 옮겨 제작한, 그분의 두 번째 장편인 호피와 차돌바위를 동아극장(구 아세아 극장)에서 개봉하게 된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홍길동 편에서 활약하던 호피와 차돌바위가 함께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내용인데 제작 기간은 총 7개월이 소요됐고 제작 인원은 30명이었으며 제작은 합동영화사에서 촬영은 대영동화(대영자막실-박성근)에서 완성했다. 감독-신동헌, 구성-신동우, 제작-박성근, 각본-신동철, 촬영-조민철, 그리고 음악-전정근이 각각 담당했다.

1967년 12월 4일, 제6회 대종상 시상식이 시민회관에서 거행됐다. 극영화 부문, 최우수 작품상, 특별 장려상, 감독상, 촬영상, 편집상, 음악상, 조명상, 녹음상, 신인상에 대한 시상이 있었으며, 비 극영화 부문에서는 만화영화(문화영화) 홍길동이 대종상을 받았다. 상장 내용을 보면 ‘대종상-부문별-문화 영화상(홍길동), 세기상사주식회사, 성명: 우기동, 이 분이 담당한 위의 부문은 제6회 대종상 심사위원회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선정되었으므로 이에 상장 및 상패를 수여함. 1967년 12월 4일, 사단법인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회장 이해랑’이라고 기재돼 있다.

1969년 국립영화제작소는 ‘한글’이라는 주제로 10분 27초짜리 분량의 교육 홍보용 만화영화를 제작했다. 내용은 지구 상에 234종의 말이 있으나 글을 가진 민족은 겨우 50여 민족이며, 그 가운데서도 우리 한글이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다는 것이다. 문학박사 정윤섭 씨는 그림편지, 상형문자, 중국의 한문, 서양의 로마자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한글이 세계적으로 우수한 이유를 강조했다. 불편한 한문을 이용해 억지로 사용해오다 말은 있으나 글이 없는 우리를 불쌍히 여긴 세종대왕이 1443년 만든 훈민정음은 과학적, 철학적, 과학적으로 뛰어난 글자이며 이를 이용해 우리 문화를 발전시켜야 나가야 할 때임을 강조했다.

이남국
·전 홍익대 조형대학디자인영상학부 애니메이션 전공교수
·전 월트디즈니 & 워너 브러더즈 스튜디오 감독 및 애니메이터
·국립공주대학교 영상예술대학원 게임멀티미디어학과 공학석사
·CANADA SENECA COLLEGE OF APPLIED ARTS & TECHNOLOGY

출처 : 월간 <아이러브캐릭터> 2019.08월호 
<아이러브캐릭터 편집부> (master@ilovecharacter.com)